국제 곡물가가 심상치 않다. 밀값은 최근 두 달 동안 80%가량 폭등했다. 옥수수 보리 등 다른 곡물도 올 들어 30~70%씩 뛰었다. 쌀 등 주요 곡물가가 단기간 내 3~4배로 폭등,이집트 방글라데시의 폭동사태를 불러 오기도 했던 2008년 '애그플레이션(농산물 가격 급등에 따른 물가상승)'이 재연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러시아 밀 생산량 올해 21% 줄듯

곡물가 상승은 밀이 주도하고 있다. 6일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에 따르면 밀 12월물 선물가격은 부셸당 59.75센트 오른 8.1525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밀 12월물 선물은 전날 한때 60센트가 올라 가격제한폭(8.27%)까지 치솟기도 했다. 지난 6월 중순 이후 80% 가까이 올랐다. 시장분석기관인 미국 인포마이코노믹스는 "올해 러시아의 밀 생산량이 가뭄으로 인해 21%가량 줄어들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

문제는 다른 농산물까지 덩달아 뛴다는 점이다. 원당가격이 지난 5월 이후 17%가량 올랐고,코코아와 커피가 올 들어 30%가량 급등했다. 맥주원료로 많이 쓰이는 보리도 올해 70%가까이 올랐다.

농산물가격 폭등의 일차적인 원인은 이상기후다. 지구촌 곳곳이 가뭄과 홍수 등으로 곡물 생산에 비상이 걸린 탓이다. 40년 만에 가뭄에 시달리는 러시아 외에도 영국과 독일은 강수량이 크게 줄어 수확량 감소를 걱정한다. 독일의 6월 강수량은 전년도의 42%에 그쳤다. 반면 파키스탄과 중국은 홍수로 2000여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풀린 시장의 풍부한 유동자금이 상품펀드와 헤지펀드 등으로 유입되면서 농산물 가격의 고공행진을 부추기는 것도 주요 요인이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유럽 재정리스크가 소강국면에 접어들면서 유로화가 강세를 보이자 달러 캐리 자금이 농산물 선물 등 위험자산 투자에 적극 뛰어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치적 변수도 커졌다. 최근 전체 농산물 수출의 절반을 통제할 무역회사를 설립한 러시아가 지난 5일 자국의 밀 수출 금지로 국제가격 폭등을 촉발시킨 것이 대표적이다. 러시아발 수출중단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지도 주목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벨라루스와 카자흐스탄에도 곡물수출 중단을 요구함에 따라 도미노 수출중단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008년 애그플레이션을 심화시킨 원인 중 하나가 인도 베트남 등 주요 곡물생산국가의 수출 동결이었다.

◆호주 · 아르헨티나 12월 수확량이 변수

러시아 밀값 폭등이 당장 국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전망이다. 러시아 밀은 대부분 이집트와 이스라엘 등 아프리카,중동지역으로 수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제가에 영향을 미쳐 장기적인 수급안정을 장담할 수는 없다.

주목할 것은 두 가지다. 이상기후 현상의 지속 여부와 주요 생산국들의 정치적 판단이다. 업계에선 올 12월의 추수량을 주시하고 있다. 호주와 아르헨티나 등 주요 산지 기후에 '이상'이 이어질 경우 밀값은 예측이 어려운 수준으로 치솟을 수 있다.

시카고의 곡물 트레이더인 리처드 펠츠는 "향후 공급량 감소를 감안할 때 앞으로 생산될 밀에 투자를 늘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밀과 옥수수 등은 동물의 사료이기도 해 돼지고기 닭고기 등 축산물 가격까지 불안해질 수 있다.

자케 디오프 유엔식량기구 사무총장은 "패닉(공황상태)에 빠진 곡물 수요자들이 경쟁적으로 곡물을 선취매하거나 강력한 투기세력이 유입할 경우 세계 곡물시장은 2008년의 악몽이 재연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최악의 상황은 피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미국의 밀 재고량은 3000만t으로 2008년에 비해 800만t이 더 늘어났다. 세계 최대 농산물 거래 회사인 카길 측은 "2008년에는 원유값이 배럴당 100달러를 넘나들면서 곡물을 바이오 연료 생산에 전용한 탓에 가격상승폭이 컸다"며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고 말했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