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으로 시작하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에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라는 표현이 전형적인 일본 말법이란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일본말 '~において'가 그대로 '~에 있어서'로 온 것이다. 어째서 일본 말법이 버젓이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까지 나타난 것일까?

하지만 그것은 약과다. 우리가 흔히 잘못인 줄도 모르고 함부로 쓰는 일본식 표현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을 만큼 수두룩하다. '범인은 형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는 '범인은 형사들이 체포했다'로 써야 우리말,우리글이다. '의하여' '관하여' '대하여' 따위가 모두 일본식 어투이기 때문이다. '태극전사들이 속속 도착하였다'에서 '속속'도 중국 글자지만 일본인들이 많이 쓰는 표현이다. '잇달아'나 '자꾸' '연달아'로 고쳐서 써야 옳다. '전쟁선포에 다름 아니다'도 '전쟁선포나 다름이 없다'로 써야 우리 표현이 된다. '다름 아니다'가 일본식 표현이기 때문이다. '김연아,마오 꺾고 기대에 값한다' 역시 일본 말투다. '~에 값한다'가 일본식 표현임을 알았다면 분명히 다르게 썼을 것이다. 일본 선수 아사다 마오를 꺾자면서 굳이 일본 말투로 표현한 신문기자의 우리말 실력이 아쉽기만 하다.

이 밖에도 '미소' '연인' '그녀' '기라성' '축제' 따위의 수많은 일본 단어를 우리말로 고쳐 쓰자는 얘기는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하다. 미소는 '웃음',연인은 '애인'이나 '정인',그녀는 이름을 바로 쓰거나 '그'로,기라성은 '걸출한'이나 '뛰어난'으로,축제는 '잔치'로 써야 한다. 이런 것들을 방송이나 신문사에서만이라도 도표로 만들어놓고 자꾸 고쳐 쓰는 버릇을 들여야 언젠가는 우리말,우리글을 되찾을 수 있다. 그것이 진정으로 일본이 저지른 식민지배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신문과 방송이 모르고,국가 지도자와 문필가가 그릇된 말을 쓰고,국어교사가 스스로 모르니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칠 리 없고,헌법과 국어사전마저도 엉터리이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마냥 개탄스러울 뿐이다.

경술국치 100주년이란 거창한 구호보다도,세세한 곡절을 무시한 채 친일 인명사전을 만들어 배포하는 것보다도 오늘 현재,자신과 주변부터 일제 잔재를 걷어내려고 노력하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과거청산이 되는 것이다.

다행히 법제처에서는 2006년 이후 5개년 계획으로 일본어식 용어와 어려운 한자 말을 쉬운 우리말로 바꾸고,길고 복잡한 법령문장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고쳐나가는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사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그에 따라 해마다 200~300건의 정비대상 법률 개정을 추진했고,올해에도 262건의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해놓고 있다. 이런 사업이 당장 눈에 띄는 효과를 거두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10년,20년 뒤엔 대한민국의 모든 법령이 지금 같은 한자와 일본어 투성이에서 벗어날 수 있고,그 법령으로 공부한 판 · 검사들 또한 판결문이나 기소문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쓰게 될 거라는 희망이 살아난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제안하면 이제쯤 모두가 합심해 옳은 국어사전을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한글사전들은 빠짐없이 일본 어투를 그대로 단어풀이나 예문으로 쓰고 있다. 헌법과 국어사전은 우리 겨레의 상징인데 적어도 그것만은 식민지 늪에서 건져 올려 말끔히 씻어야 하지 않겠는가? 올해로 광복을 맞은 지 65년이 됐다. 어쩌면 지금도 늦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더 늦으면 겨레말과 글을 되살릴 기회는 정말로 다시 오기 어렵다.

김정산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