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과 협조체계로 2개월만에 가시적인 성과
중수부 "일선검찰 역량결집 새 수사모델 정립했다"


한때 국내 소프트웨어 업계의 대표주자로 주목받았던 H사는 작년 4월 회사가 매각되면서 사세(社勢)가 급격히 기울었다.

새 경영진이 수백억원의 증자와 함께 몽골 구리광산 개발 등 신사업을 공격적으로 추진했지만 적자폭은 오히려 580억원으로 커진 것.
문제는 새 사주에게 있었다.

H사를 인수한 실질적인 사주 이모(53)씨는 자신의 뱃속을 채우기 위해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나 소액 투자자들의 피눈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악질 기업사냥꾼이었다.

이씨는 투자가치가 전혀 없는 몽골법인을 `단돈' 100만원에 사들이고도 290억원의 회사자금으로 지분 51%를 취득한 것으로 속이는 등의 수법으로 총 490억원을 횡령했다.

그는 H사 인수 전에도 여러 개의 상장기업을 옮겨다니며 주가를 조작해 처벌받았고, 그가 손을 댄 상장사 2곳은 결국 퇴출됐다.

대검 중수부(김홍일 검사장)가 1일 공개한 부실기업 비리 수사의 중간결과는 그동안 감시ㆍ감독의 사각(死角)에 있어 처벌이 어렵던 `숨은' 기업비리에 본격적으로 메스를 들이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검찰이 지금까지 특정 대기업을 상대로 분식회계 등 불법 행위를 수사한 적은 있지만 소액투자자에 피해를 안겨주는 부실 중소기업의 폐해를 중수부의 기획 하에 동시다발 수사를 통해 파헤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검찰에 따르면 처음부터 정상적인 회사 경영에는 관심이 없는 기업사냥꾼들은 자기자본 없이 사채 등을 끌어들여 중소형 상장기업을 인수해 횡령, 배임 등으로 회삿돈을 빼돌리거나 주가조작으로 이득을 챙기는 등 단물만 빼먹고 버리는 `먹튀'들이다.

이 과정에서 회사 주가는 호재성 허위공시 등으로 치솟을 대로 치솟다 바닥으로 추락하고 전후 사정을 모르고 투자한 '개미'들은 상장폐지돼 주식이 휴지조각이 된 것을 보고서야 사태의 전말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다.

매년 유사한 수법에 넘어가 수십 곳의 상장사가 퇴출되고 수많은 투자자가 통탄의 눈물을 흘리지만, 지금까지 수사ㆍ감독당국은 마땅히 손 쓸 방법을 찾지 못했다.

투자시장의 감시ㆍ감독 시스템이 상장사 위주로 가동되는 탓에 퇴출기업까지 관심을 기울이기 어려운 데다, 증시 퇴출 후 회사가 문을 닫거나 해체되면 비리 혐의가 있어도 증거를 확보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로 고소ㆍ고발에 의존하는 부실기업 수사는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정략적으로 제기됐던 고소ㆍ고발이 당사자들 간의 합의로 취소되기 일쑤여서 수사가 제대로된 성과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검찰은 이번 수사에서 이런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금융감독원을 비롯한 금융감독당국과 긴밀한 협조 체계를 구축해 상장 폐지되거나 폐지될 위험에 있는 부실기업들을 신속하게 파악해 수사에 착수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5월 수사 기획단계부터 금융감독당국에서 필요한 자료를 넘겨받고 손발을 맞춰나갔으며, 덕분에 2개월여 만에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과거 금융감독당국이 적발해 검찰로 넘긴 비리 사건이 마무리되기까지 1년 넘게 걸렸던 것에 비하면 기간이 크게 단축된 셈이다.

사정수사의 최고 사령탑인 대검 중수부가 지휘한 이번 수사를 계기로 선량한 개미투자자를 울리는 전문 기업사냥꾼들이 더 이상 활개치지 못하고 투자시장의 건전성이 높아지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중수부는 과거 대형 권력비리 수사 때와는 달리 직접 수사를 자제하고 일선 검찰의 역량을 결집하는 새로운 수사모델을 정립했다고 자평했다.

이창재 수사기획관은 "검찰은 앞으로도 금융당국 등과의 협조를 통해 서민투자자들을 울리는 기업사냥꾼과 악덕 기업주, 이에 가담하는 사채업자, 공인회계사 등에 대을 발본색원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abullapi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