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부정 사건으로 2001년 후반에 파산한 에너지 기업 엔론은 2000~2001년 '딜리전스'라는 민간 첩보회사로부터 정기적으로 특이한 자료를 받았다. 유럽의 12개 대규모 발전소 상공에서 석탄 더미는 얼마나 쌓였고 직원 주차장에 자동차는 평소보다 많은지 등을 조사한 것이었다. 부동산 개발업자나 측량기사,다른 전문가들과 마찬가지로 당국에 보고한 합법적인 비행을 통해 이뤄진 조사였다.

같은 시간,런던의 딜리전스 직원들은 해당 발전소에서 가장 가까운 호텔에 전화를 걸어 향후 몇 주간의 객실 예약 현황과 객실료,언제쯤 호텔이 꽉 차는지 등을 알아냈다.

《브로커,업자,변호사 그리고 스파이》는 일반인들에겐 생소한 기업 첩보시장을 다룬 책이다. CNBC와 '비즈니스위크'를 거쳐 정치전문지 '폴리티코'의 기자로 활동 중인 저자는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러시아의 국가보안위원회(KGB),영국의 첩보기관 MI5 등에서 일했던 스파이들이 이제는 민간 대기업과 거대 자본가를 위해 뛰는 비밀스런 현장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딜리전스가 엔론에 제공한 자료들은 얼핏 무의미해 보이지만 대형 발전소가 유지 · 보수를 위해 언제 작동을 멈추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발전소가 며칠씩 작동을 멈추면 공급 감소에 따라 세계 에너지 시장에선 전기료가 올라간다. 따라서 발전소 운영 스케줄을 손에 쥔 기업과 투자자들은 전기료가 언제 오를지 확신을 가진 채 에너지 시장에 돈을 걸 수 있었다.

딜리전스의 스파이들은 발전소가 작동을 멈추기 전엔 석탄 공급량을 줄이고 유지 · 보수 전문가들이 묵을 호텔 방을 대거 예약한다는 점을 파악했다. 그리고 이같은 정보는 엔론을 통해 에너지 시장의 트레이더들에게도 흘러들어갔다.

저자는 이미 글로벌 기업들과 비즈니스 세계에선 기업첩보가 광범위하게 퍼졌다고 설명한다. 19세기 중반 기업가인 앨런 핑커턴부터 시작된 민간 첩보산업은 스니커즈와 M&Ms의 생산업체인 마스와 네슬레의 초콜릿 전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실제 사례를 통해 영화처럼 펼쳐진다.

스파이들의 독특한 접근법도 흥미롭다. 예컨대 한 투자사가 제약사인 빅파머에 대해 문제가 없는지 알고 싶다면 스파이들은 해당 회사의 기록을 분석하거나 경영진을 인터뷰하는 등의 전통적인 방식을 택하진 않는다. 대신 구직사이트에 잠재적인 고용주인 것처럼 위장 등록을 한 후 빅파머사를 떠나고 싶어하는 직원들의 이력서를 추적하고 다시 가짜 헤드헌팅 회사를 차려 이 직원들을 면접하는 식이다.

저자는 "기업 첩보업은 세계화와 정보에 대해 점점 커지는 요구로 인해 생겨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서도 윤리성과 합법성에는 의문을 던진다. 대중과 사회를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는지 의문스럽다는 얘기다. 그의 결론은 간단하다. 1990년대에 생겨난 로비스트 등록제와 같이 첩보회사도 보다 투명하게 감시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