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후반 대외무역 팽창으로 자금수요 크게 늘어
상인들 자본모아 회사 세우고 전액 국왕에게 대부
로마시대에는 개인 사업자들에 의해 금전대출이 이루어졌다. 대금업에 대한 국가의 규제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여윳돈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금전적 이익을 챙기는 것을 기독교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중세에 접어들면서 기독교는 사회 전반에 걸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일체의 이자는 법으로 금지됐고 위반자는 엄한 처벌을 감수해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자 대출의 관행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자를 내더라도 돈을 꼭 빌려야 하는 사람들과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떤 위험부담도 불사하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 중세시대 대금업자들은 대부분 유태인이었다.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죄로 '정상적인' 사회영역에서 철저히 배제된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직업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15세기 이후 대출의 사회적 효용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합법적으로 영업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과 아우구스부르크의 푸거 가문이 대표적이었다. 빈민구제를 목표로 하는 빈민은행들도 설립되었다.
근대식 은행은 1609년 설립된 암스테르담 은행이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지방은행이었지만 당시 국제금융의 중심지에서 이 은행이 수행한 역할은 결코 작지 않았다. 환어음 발행과 지불보증 업무 등을 통해 국제적인 상업거래를 활성화시켰고 외환업무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함으로써 그동안 사설은행의 난립으로 빚어진 화폐상의 혼란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근대은행의 역사에서 볼 때 암스테르담 은행은 완벽한 역할 모델은 아니었다. 오직 암스테르담 시와 동인도회사에 대해서만 대부했을 뿐 일반인에게는 오랫동안 문이 닫혀 있었던 것이다. 보다 근대적인 성격을 가진 은행은 1694년에 설립된 잉글랜드 은행이었다.
17세기 영국 상인들은 여유 자금을 정부 기관인 조폐창에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돈이 궁해진 당시 국왕 찰스 1세가 '대부(貸付)'라는 명목으로 조폐창에 보관 중인 상인들의 돈 20만파운드를 강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자 상인들은 조폐창에서 돈을 빼서 골드스미스,즉 금장(金匠)들에게 맡기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예금에 대한 이자도 지불했고 영수증도 발행했다. 이들이 발행한 영수증은 마치 은행권처럼 통용되기도 했다.
17세기 후반 영국의 대외무역 팽창으로 상인과 운송업자들의 자금 수요가 크게 늘어나면서 새로운 금융기관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잉글랜드 은행의 설립 배경은 또 있었다. 그것은 당면한 국가 채무의 해결이었다.
잉글랜드 은행의 창안자는 윌리엄 패터슨이라는 상인이었다. 그의 제안은 상인들이 120만파운드의 자본을 모아 주식회사를 세우고 이 돈을 모두 국왕에게 대부하자는 것이었다. 그 대신 상인들은 출자액만큼을 은행권으로 교부 받아 지불수단으로 통용할 수 있게 하자고 했다.
은행 설립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많았다. 나라의 모든 부(富)가 한 개 은행에 집중되고 종국에는 국왕 한 사람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고 현금을 가진 금융자산가들의 지위가 전통적 지배계급인 토지 자산가들의 그것을 능가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관련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면서 잉글랜드 은행의 설립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불과 열흘 남짓 만에 120만파운드의 출자가 종료되었으며 곧바로 예금,대출,어음할인,은행권의 발행 등 근대적 은행의 기능들이 작동하기 시작하였다.
허구생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