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세우려고 정신없이 분주하던 1996년 5월 말.2002년 월드컵을 한국과 일본이 공동 개최하기로 결정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건설사업관리(CM · Construction Management) 업체를 만든 나에게는 단순히 '월드컵 경기가 우리나라에서 열리는구나'란 부푼 기대보다 '경기장도 짓겠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건설공사의 문제점이 봇물 터지듯 제기됐던 시기였다. 건축학과를 나와 대형 건설사를 다니던 나는 건설 시공을 맡긴 발주자가 기획 단계에서부터 완공까지 전 과정을 관리하는 CM이 국내에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사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축구 전용 경기장을 신설한다 해도 국내에 CM이 도입되지 않았던 터라 생소한 데다 신생 회사로서 공공 공사에 적용할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었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길 바라는 소망만큼이나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나는 낙타의 고삐를 단단히 움켜 잡았다.

1997년 여름.나는 회사 임원 1명과 전문가 2명으로 '월드컵주경기장 CM발주대비팀'을 만들어 해외 유명 경기장을 벤치마킹하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경기장 건립 방안이 논의됐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일이 터졌다. 그해 겨울 외환위기가 닥쳐온 것이다. 막대한 건립비 부담과 월드컵 개막 전까지 공사를 끝낼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이를 둘러싼 찬반 논란이 확산되며 정부의 결정은 미뤄지기만 했다. 막 사업을 시작한 입장에서 선진 건설관리기법인 CM의 유효성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답답한 노릇이었다.

건설 시장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기존 계약이 중지되는 판에 발주도 되지 않은 프로젝트를 대비하는 나에게 회사 안팎에서 부정적인 의견이 쏟아졌다. 그렇지만 자신이 있었다.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이 없는 만큼 오히려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생각했다. 단 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도전해보자고 마음을 다져 먹었다. 그러자 마음이 편해졌다. 자료 수집을 위해 해외 경기장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운이 따랐다. 때마침 문화관광부(현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경기장 후보지 선정 평가단을 구성했는데 위원으로 뽑혔다. 나는 월드컵 주경기장 신설을 강력히 주장했고,교수들을 비롯한 여러 위원들도 뜻을 같이 했다. 1%의 가능성이 급속도로 커지는 순간이었다. 1998년 8월 월드컵주경기장 신축이 결정됐다. CM 용역도 발주됐고 본격적인 입찰 경쟁이 시작됐다. 설립된 지 2년밖에 안 된 우리 회사는 여러 조건에서 불리했다. 하지만 '해내고야 말겠다'는 직원들의 열정에서 '우리가 된다'는 확신을 가졌다.

1998년 9월7일을 아직도 기억한다. 서울 상암동 월드컵주경기장 CM 입찰 결과 발표에서 우리 회사가 뽑힌 날이다. 해냈다는 감격에 가슴이 벅차 올랐다.

진짜 고비는 낙찰 이후였다. 공사 기간은 고작 3년 남짓이었다. 착공된 국내 다른 도시 경기장에 비하면 절반에도 못 미쳤다. 모든 기술력을 동원했고 프로젝트에 참여한 직원들을 모질게 독려했다. 월드컵주경기장은 회사의 명운을 가르는 것은 물론 대한민국에 CM 도입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결국 월드컵주경기장 공사는 2001년 말 예정보다 4개월 줄인 33개월 만에 끝났다. '일정에 맞출 수 있겠느냐'는 우려와 걱정은 환호와 탄성으로 바뀌었고,우리는 대한민국 건설사에 CM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상암동 월드컵주경기장을 성공적으로 완공한 덕분에 CM의 효용성이 입증됐다. 이를 계기로 대형 프로젝트 수주가 물밀듯이 이어졌고,우리 회사는 외환위기의 파고를 가뿐히 넘기며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다. 2008년 세계적 건설전문지인 ENR지는 한미파슨스를 미국을 제외한 국가 가운데 16위 CM 기업으로 선정했다. 작년에는 유가증권시장에 회사를 상장했다. 한미파슨스는 세계 36개국에서 CM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해가 갈수록 나이테같이 성장해 가는 조직의 규모를 실감하고 있다.

'2002 월드컵'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계기이자 오늘날까지 쾌속 성장할 수 있게 해준, 소중한 인연이다. 월드컵이 열릴 때마다 붉은 악마 못지않게 내 가슴이 뜨거워지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