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은행들의 '고난기'가 시작됐다. 그리스발 유럽 재정위기의 후폭풍이 끝내 금융사들에까지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시가총액 기준 유럽 3위이자 프랑스 최대 은행인 BNP파리바의 신용등급이 하향 조정됐고,유럽 금융계의 화약고인 스페인 은행들에 대한 신용평가사들의 '부정적' 전망도 이어지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 고위 임원마저 "역내 일부 은행들의 차입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며 우려를 표하고 나섰다.

◆재정위기,은행들 집어삼키나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신용평가사 피치는 21일 프랑스 BNP파리바의 신용등급을 종전 'AA'에서 'AA-'로 한 단계 떨어뜨렸다. 'AA-'는 최고등급보다 세 단계 낮은 수준이다. 피치는 "기업 부문과 투자은행 사업에 치우친 BNP파리바의 사업구조가 신용등급 강등의 이유"라며 "지난해 자산의 질이 현격히 악화됐고,같은 등급의 금융회사에 비해 자기자본비율도 다소 낮다"고 설명했다.

BNP파리바의 신용등급 하향은 그리스발 재정적자 위기 발생 이후 첫 유럽 대형 은행의 등급 하락 사례여서 주목된다. BNP파리바는 유럽 재정적자 위기의 진앙지 그리스에 60억파운드의 거액을 대출해주는 등 소시에테제네랄,크레디아그리콜 등과 함께 'PIGS(포르투갈 아일랜드 ·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국가'에 대한 익스포저(위험 노출액)가 가장 많은 은행 중 하나로 꼽혔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도 이날 스페인 양대 은행인 산탄데르은행과 BBVA를 제외한 6개 주요 스페인 은행들에 대한 신용등급을 발표하면서 "현재 일반적인 예상보다 스페인 은행들의 대출 및 운영 실적이 훨씬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며 대부분의 은행에 '부정적' 신용전망을 부여했다. S&P는 라카이하,카하마드리드,방코포퓰라르,방코데사바델,이베르카하,방코인테르 등 스페인 은행들에 대해 현 등급을 유지하면서도 "내년까지 부동산 가치 급락에 따른 은행들의 대출손실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며 "향후 몇 년간 스페인 은행들은 어려운 시기를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앞서 글로벌 금융시장에선 "스페인 최대 은행인 산탄데르은행이 '스트레스 테스트(자본충실도 테스트)'결과 추가적인 자본확충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루머가 퍼지면서 스페인 은행들에 대한 위기감이 급증했다. 현재 스페인 주요 은행들은 정상적인 자금조달이 어려워지면서 ECB 대출 비중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유럽 은행들에 대한 시장의 경보음이 잇따르는 가운데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이자 ECB 통화정책 이사인 크리스티앙 노이어가 "유럽 은행들에 대한 불안이 가중되면서 역내 일부 은행들이 차입에 문제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했다.

◆"재정적자 못 줄이면 EU 투표권 회수"

유럽 재정위기가 민간 금융위기로 빠르게 확산되면서 시장 신뢰 회복을 위한 각국의 과감한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장 클로드 트리셰 ECB 총재는 유럽의회 연설에서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제한한다는 '성장과 안정화 협약'을 준수하지 못한 국가에 대해선 (유럽의회) 투표권을 한시적으로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리셰 총재는 "유럽연합(EU)의 재정 기준을 지키지 못하는 국가에 대해선 현재보다 훨씬 자주 엄격한 재정 보고를 강제하는 등 다양한 비경제적 제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트리셰 총재는 또 EU 각국이 재정동맹에 상응하는 역할을 하는 기구를 도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주제 마누엘 바로수 EU 집행위원장은 "7월 하반기에 25개 유럽 대형 은행의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 공개가 예정돼 있지만 시장의 신뢰 회복을 위해 훨씬 많은 은행에 대한 결과를 공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