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국에서 5년여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74년 귀국했다. 33세의 나이로 행남자기의 경영 책임을 맡게 된 당시 국내 경기는 오일 쇼크로 인해 최악이었다. 내수가 꽁꽁 얼어붙은 만큼 해외시장 개척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수출에 집중하기 위해 행남자기와는 별도로 행남특수도기라는 수출 전문 법인을 설립한 뒤 해외에서 주목받고 있던 스톤웨어 재질의 디너 세트를 수출품목으로 선택했다. 스톤웨어는 두껍고 실용적인 제품으로 서양에선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식기로 매우 각광받고 있었다. 국내에선 개발 업체가 없었고 전 세계에서 일본이 최대 수출국이었다. 게다가 개발도상국에 대한 특혜관세 혜택에 따라 미국으로 수출할 경우 관세가 붙지 않는다는 장점까지 있었다.

이미 1973년부터 스톤웨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놓고 있었기에 곧 개발에 들어갔다. 국내 최초로 롤러머신이라 일컬어지는 최신 자동성형기를 들여와 대량생산의 기틀을 다졌다. 기존 거래처로부터 선주문까지 받았다.

그런데 바이어들이 만족할 만한 품질의 신제품을 만드는 것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스톤웨어는 산화철이 함유된 유약을 발라 구워내야 하는데,이 산화철들이 고르게 퍼지지 않고 한쪽으로 몰려 불량품이 쏟아졌다. 여기에다 유약이 한쪽으로 몰리는 부유현상까지 겹쳐 시험생산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스톤웨어를 수입하기로 했던 미국 회사에서 두 명의 기술자를 파견했지만 해결책을 찾지 못했고,일본에서 온 기술자들도 두 손 들고 돌아갔다.

이제 믿을 곳이라고는 우리 자신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나와 특수도기의 기술자들은 해결책을 찾기 위해 연구를 거듭했다. 실험실에선 성공한 스톤웨어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대형 가마에 적용하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봄부터 시작한 연구는 한여름까지 계속됐다. 무더위 속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다 집에 돌아가 땀에 전 러닝셔츠를 벗어 쥐어짜면 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렇게 고생하면서도 누구 하나 불만을 드러내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끈질긴 노력 끝에 일본 제품보다 강도가 1.5배 높으면서 중금속 용출기준도 여유있게 지키는 제품을 양산할 수 있었다. 오로지 우리 기술만으로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1974년 9월30일 첫 출하를 시작으로 스톤웨어는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지만 미국 시장에만 국한된 만큼 수출대상국의 확대가 절실했다. 나는 행남자기에서 고급도자기로 자체 개발한 본차이나의 샘플과 계약서를 들고 유럽으로 건너갔다. 사전 약속없이 당시 유럽 최고의 도자기 수입업체였던 융거한스의 네덜란드 본사로 불쑥 들어갔다. 스테인스하르그 사장은 "왜 우리가 가까운 지역의 거래처를 놔두고 물류기간이 더 길고 비용도 그만큼 더 들어갈 행남자기의 제품을 수입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했다. 나는 이 당연하면서도 황당한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어났다. 회사 제품을 들고 유럽의 자기와 맞부딪쳐 유럽 자기를 깨뜨려 버리곤 아무 말도 않고 앉아 있었다. 스테인스하르그 사장은 입이 쩍 벌어지면서 "원더풀 원더풀"을 연발했다.

후에 들은 얘기이지만 스테인스하르그 사장은 로열덜튼,웨지우드,로얄코펜하겐 등 진열장에 있던 유명 도자기 업체들로부터 받은 샘플 중 하나가 아시아의 젊은이가 꺼내든 한국산 도자기 앞에 맥없이 깨지는 모습을 보면서 유럽 명품에 대한 역사와 전통의 자부심이 한순간 무너지는 충격을 받으면서 나의 패기에도 반했다고 한다. 이 같은 기행으로 계약에 성공한 것은 물론이고 이 일을 계기로 수출 주문이 늘면서 첫 계약으로부터 9개월 만에 수출 100만달러를 돌파했다. 행남자기는 스톤웨어의 인기에 더해 유럽지역의 주력품으로 성장할 수 있는 본차이나를 새로운 수출 아이템으로 추가,성장을 지속할 원동력을 얻게 됐다.

도자기 제품은 어떤 각도와 세기로 어느 부분과 부딪치느냐에 따라 깨지는 양상이 다르다. 비록 처음부터 의도하지는 않았지만,당시 도자기를 판매하던 사원에게서 어깨 너머 익힌 이치를 그날 그 순간 활용해 그토록 큰 효과를 볼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