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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자칼럼]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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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의 18번이었다. 덕분에 그 시절부터 알던 이들을 만나면 으레 불러야 한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

    1절도 좋지만 2절이 더 괜찮았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 '봄날은 간다'>

    지금도 알지 못한다. 돌이켜 보면 분명 화창한 봄날이었으나 정작 그땐 고단하고 불안해 인생의 봄날인 줄조차 몰랐던 20대에 왜 그 노래를 그토록 즐겨 불렀는지.아무튼 몇몇이 모여 돌아가며 한 곡씩 뽑을 때는 물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면 혼자서도 곧잘 흥얼거렸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에서 목청을 돋우다 '알뜰한'에서 꺾어 '봄날은 간다'에 이르러 한숨을 쏟아내면 가슴 속 응어리가 풀리곤 했다. 구성지고 서글픈 가락이 지닌 묘한 카타르시스 효과 때문인지,제목의 상징성 덕인지 노래는 고전이 됐다.

    6 · 25전쟁 직후인 1953년 백설희씨에 의해 발표된 뒤 60년 가까이 남녀노소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게 그것이다. 중장년층 사이에 주로 불리던 노래는 2001년 가을 이영애 유지태 주연의 동명(同名) 영화가 히트하면서 젊은층에도 널리 퍼졌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느냐"는 애절한 물음 앞에 "헤어져"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선 사람을 그리며 부르는 노래는 사랑을 잃고 우는 젊은 남녀의 마음을 적시며 크게 유행했다. 조용필 심수봉 장사익씨 등 리메이크한 가수도 많은데 특성에 따라 각기 다른 느낌으로 다가선다.

    장사익씨의 유장한 소리는 처연하고 조용필씨의 노래는 속절없이 지는 봄날의 아픔을 고스란히 전한다. 이름처럼 맑고 고운 목소리의 가수 백설희씨가 세상을 떠났다. 악극단 배우를 거쳐 '봄날은 간다'로 가수로서의 봄날을 열었던 이가 라일락 꽃잎 흩날리는 봄날 스러졌다.

    '산다는 건 하나씩 없어지는 걸 겪는 것'(구효서)이라는 말도 있거니와 사는 일은 쉽지 않다. 천하를 다 얻은 것 같던 사랑을 잃기도 하고,승승장구하다 한순간 점점 작아지는 상자에 갇힌 것처럼 되기도 한다. 봄이 가고 있다. 어쩌랴. 먼 훗날 잠에서 깼을 때 후회할 일을 남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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