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 걷어차기'라는 말이 있다. 한 소장 경제학자의 저서 제목으로 유명해진 이 용어는 자본주의체제 형성과정에서 선진국이 후진국에 강요하는 여러 기만적 행태를 가리킨 것이다.

역사적으로 국내 산업에 대한 각종 보호와 특혜를 통해 경제를 발전시킨 선진국들이 자신을 추격해오는 개발도상국이 동일한 정책이나 제도를 채택하려 할 때 이른바 자유주의 경제체제에 위배된다며 이를 금지시키고 방해하려 드는 것은 참으로 위선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사다리 걷어차기'란 개념은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불온시하고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최근의 사회적 흐름에 제동을 거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다리를 타고 먼저 정상에 도달한 이가 정작 자신이 딛고 올라온 사다리를 치워버림으로써 뒤따르는 이들의 상승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는 논리는 국가간 경제정책에 한정된 사안이 아니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인간 사회의 모든 부면(部面)에 걸쳐 크고 작은 사다리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뒤처진 자들은 앞서간 자들을 따라잡으려 하고 앞서간 자들은 뒤따라오는 자들의 진입을 봉쇄하려 한다. 강대국과 약소국,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사이에 대화와 타협을 통한 문제 해결은 요원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때로는 지나친 경쟁의 결과로 비극적 충돌이 발생하기도 한다.

순리에 따르면 가진 자의 양보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만큼 우리 현실이 단순하지 않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개념의 반대편에 '밥상 걷어차기'라는 행태가 자리잡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가진 자들이 자기들만의 철옹성 안에서 부와 권력을 향유할 때 그로부터 배제된 존재들은 부단히 그런 불평등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시도가 아무런 결실 없이 끝나고 말면 기존 체제나 구조를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모반을 기도하기에 이른다. 아예 밥상을 걷어차버리는, 그래서 판을 바꾸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되는 것이다.

테러리즘이나 핵 개발,숭례문 방화사건과 같은 국내외 문제에서 무력 시위가 꼬리를 물고 발생하고 있다. 밥상에 자기 숟가락 하나 올리기 힘들다는 이유로 아예 밥상을 뒤엎어버리고자 하는 이들의 움직임은 절망적인 시도라지만 그만큼 위험하고 무책임하기도 하다. 그들은 차근차근 사다리를 밟고 오르는 수고를 하기보다는 '전부(全部)가 아니면 전무(全無)'라는 식의 도발을 택하는 것을 즐긴다. 그들은 적어도 밥상 전체를 뒤집지는 못해도 최소한 그 일부에라도 타격을 가하거나 소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이런 밥상 걷어차기 식 행태는 우리 지식인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경제적 근대화와 정치적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우리나라는 점차 변동의 진폭이 예전에 비해 크지 않은 사회로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늘 불만을 가진 사람은 있게 마련이고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기존 구조를 뒤흔듦으로써 사태의 급반전을 추구하고자 한다. 노골적으로 밥상을 걷어차라고 부추기는 담론이 때로는 정의의 이름을 달고, 또 때로는 진보의 가면을 쓰고 여기저기서 출몰한다.

가진 자들의 사다리 걷어차기가 지극히 허구적이고 기만적인 행태이듯이 아직 가지지 못한 자들의 밥상 걷어차기 역시 매우 이기적이고 자멸적인 행위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바라건대 더 많은 사다리, 더 넓은 식탁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허용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다리든 밥상이든 함부로 걷어차려 드는 사람들이 줄어들어야 공동체의 행복지수 또한 올라갈 것이다.

남진우 <시인·명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