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도망자'의 주인공 킴블은 잘나가던 외과의사에서 졸지에 아내 살인범으로 몰려 쫓긴다. 모든 건 같은 병원 동료 니콜스의 짓.니콜스는 부작용이 있는 약의 효능을 과장하기 위해 사실을 밝히려던 사람을 교통사고로 위장해 살해하고 킴블도 모함한 뒤 기록을 조작한다.

약이 시판되기 전 사실이 밝혀진 영화와 달리 현실에선 그렇지 못해 끔찍한 사태를 불렀다. '탈리도마이드 재앙'이 그것이다. 1957년 독일 그루넨탈사에서 내놓은 탈리도마이드는 부작용 없이 불면증과 임산부 입덧에 탁월하다는 광고와 함께 처방전 없이 약국에서 판매됐다.

그러나 1년 뒤 독일을 시작으로 각국에서 손발이 짧고 심지어 몸통만 있는 아이들이 태어났다. 약은 46개국에서 1만 명 이상의 기형아가 출산된 뒤 판매 금지됐다. 알고 보니 동물 및 임상실험에서 현기증과 말초신경염 등 부작용이 드러났는데도 은폐된 채 상품화됐다는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신약 개발에선 보다 철저한 동물실험이 요구됐다. 그러나 이 같은 실험도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영국 에든버러대 연구팀이 뇌졸중 치료 관련 연구를 추적했더니 최근 공표된 동물실험 결과 중 30%가량이 내용을 은폐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한 것이다.

미국 버클리대 연구팀에선 또 동물실험이 수컷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의 문제를 제기했다. 10개 분야 중 8개 분야,특히 신경과학 부문에선 5.5 대 1 비율로 수컷을 쓰는데 만성통증이나 우울증 등 여성에게 잦은 질환의 경우 수컷 대상 실험은 왜곡된 결과를 빚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성(性)에 따라 약물의 효과나 부작용이 다를 수 있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심혈관 질환 예방에 쓰이는 저용량 아스피린(100㎎)의 효과는 남성에게 더 뚜렷하고,생리 중인 여성은 당뇨 · 천식 · 간질 치료제 복용 시 주의해야 한다고 돼 있다. 고지혈증 치료제로 판매되다 중단된 '세리바스타틴 나트륨' 부작용도 여성들에게 더 컸던 사례로 기록돼 있다.

신약 개발은 어렵다. 신물질이 신약으로 연결될 확률은 극히 낮다. 동물실험 결과는 괜찮았는데 사람에겐 뜻밖의 부작용이 생기는 일도 흔할 것이다. 시간과 비용에 쫓겨 급할 수 있다. 그렇다고 결과를 조작하거나 수컷 대상 실험결과를 여성용 제품에 적용한다는 건 기가 막히다. 이래저래 동물실험 반대론자의 목소리만 더 커지게 생겼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