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인 듯한 소년이 지하철에서 다리를 잔뜩 벌리고 앉아 있었다. 고약하다 싶은 얼굴로 쳐다 봐도 고개만 숙인 채 그대로 있자 괘씸하게 여긴 중년신사.옆자리가 나자 얼른 앉아 같은 자세를 취했다. 소년이 다가오더니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저씨도 고추 수술하셨어요?"

사정을 알지 못한 채 겉에 드러난 것만 보고 함부로 판단하면 안된다는 얘기다. 소년이 그러고 있는 게 이상했으면 왜 그런지, 다리를 좁힐 순 없는지 조용히 물어볼 수 있었을 것이다. 소명 기회도 주지 않고 단지 버릇 없다고 생각하고 행동한 결과 민망한 말을 듣게 된 셈이다.

이런 일은 수없이 많다. 미심쩍거나 궁금하면 먼저 진상을 파악하고 그러기 위해 당사자한테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한데도 대부분 적당히 짐작하거나 추측하는 상태로 지나간다. 여기까지면 다행인데 여기저기서 들리는 이야기에 상상을 더해 픽션을 만드는 수도 적지 않다.

억측의 생산과정이다. 억측은 '이유와 근거 없이 짐작하는 것'이다. 추측만으로도 엉뚱한 오해가 생겨나기 쉬운데 억측에 이르면 그 파장은 걷잡기 어렵다. 속성상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까닭이다.

천안함 침몰을 둘러싼 낭설이 도를 넘고 있는 게 그것이다. 국방부장관이 어뢰일 가능성을 언급한 것에 상관없이 항간엔 '암초충돌이다''피로파괴다'부터 심지어 '내부폭발설'에 '외계인 공격설' '미군오폭설'까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에서 보듯 억측은 작은 의혹에서 비롯된다. 천안함 사태 역시 정부와 군의 계속된 말 바꾸기와 뭔가 감추는 듯한 태도가 억측을 부추기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억측은 망상을 낳고 망상은 파멸로 이어질 수 있다.

천안함 사태는 국가 안보와 직결된 사안이다. 궁금하고 수상쩍고 이를 틈탄 음모론이 그럴 듯하게 들리는 대목이 있다 해도 확실한 근거 없이 인터넷에 떠도는 불확실한 추정을 근거로 괜한 말을 지어내고 퍼뜨리는 것은 군과 유족,정부와 국민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수 없다.

쌍끌이 어선이 침몰하는 등 비극의 끝이 어디인지도 알 길 없는 상황이다.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선체 인양에 따른 정확한 원인 규명과 실종자 확인이다. 안타깝고 답답해도 억측을 자제하고 정부와 군을 믿어봐야 한다. 억측과 낭설 확산에 따른 우리의 불안과 공포를 노리는 자들은 따로 있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