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태 23대 한국은행 총재가 이달 말 임기가 끝나 퇴임한다. 이 총재는 '물가안정'이라는 한은 설립 목적에 가장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정책금리를 사상 최저 수준인 연 2%로 떨어뜨렸다. 그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은 '인플레이션 파이터'가 아니라 '위기 극복'이었다.

이 총재를 포함해 1950년부터 지금까지 23명의 한은 총재들이 활약했다. 이들에게는 저마다 주어진 시대적 소명이 있었다.

◆1980년대 말 한은 독립 움직임

한은은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재무부 남대문출장소'로 불렸다. 경제성장을 금융 측면에서 지원하는 것이 당시 한은의 역할이었다. 이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재무부(현 기획재정부)가 한은을 장악했다. 재무부 장관이 한은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하지만 1987년 불어닥친 민주화 투쟁은 한은의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1988년 김건 당시 한국은행 총재(17대)는 직원들과 함께 '중앙은행 독립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였다. 여론도 한은 편이었다. 김 총재는 한은법 개정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차기 총재가 관의 입김에서 벗어난 학계 명망가가 임명되는 기틀을 마련했다.

◆'독립'의 기대감은 컸지만…

이렇게 등장한 인물이 18대 조순 총재다. 한은 독립 쟁취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은 조 총재는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경기가 일시 침체 국면에 들어가고 주가가 폭락하자 재무부는 한은으로 하여금 한국 대한 국민 등 3대 투신사에 거액을 저리로 대출해 주라고 압박했다. 투신사들이 무제한 주식을 사들여 주가를 끌어올리는 데 필요한 실탄을 한은이 대라는 것이었다.

조 총재는 소신을 접었다. 2조9000억원을 연 3% 금리에 1년간 대출해주는 이른바 '한은 특별융자'에 서명했다. 조 총재는 이 와중에 정치바람에 휘말리면서 1년 만에 하차했다.

뒤를 이은 김명호 총재는 재임 도중 부산지점에서 지폐가 유출되는 사고가 터져 중도 사퇴했다. 한은의 화폐 관리가 엉망이라는 질타가 쏟아졌고 때문에 한은 독립은 쑥 들어가 버렸다.

◆OECD 가입과 한은법 파동

이경식 총재는 1995년 사령탑에 앉았다. 1996년 한국이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고 금융산업이 확대되자 한은 독립 및 금융감독기구 개편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이 총재는 1997년 말 한은법 개정안 통과를 이뤄냈다. 하지만 한은 내부에선 비난의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한은 직원들은 금통위 의장을 한은 총재가 맡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은행감독원도 떼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한은 직원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시위를 벌이는 등 한은법 파동이 벌어졌다. 당시 기획부장이었던 이성태 총재는 홀로 반대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경식 총재는 이 같은 한은법 파동에다 외환위기를 막지 못한 것 등이 겹쳐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다음 해 3월 물러났다.

◆조직안정 시기

작고한 전철환 총재는 외환위기를 이른 시일 내 극복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2001년 8월 국제통화기금(IMF)에 빌린 돈을 갚는 상환서명을 하는 중앙은행 총재가 됐다. 2001년 7월엔 경기침체를 막기 위해 금리 인하를 관철시키기도 했다. 당시 공무원 출신 금통위원들이 금리 인하에 반대했는데 전 총재가 '무제한 회의'를 통해 설득했다.

더불어 통화신용정책을 선진국 모델로 바꾸는 데 기틀을 마련했다. 이전까지는 통화량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통화정책을 폈지만 전 총재는 금리를 통해 경기 물가 등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더불어 한은 독립을 위해서도 투쟁했다. 정부가 한은에 국채를 인수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시장과의 소통 중시

박승 총재는 시장과의 소통을 중시한 인물이다. 시장과 본격적인 대화를 한 첫 총재로도 불린다.

그는 참여정부 시절 부동산시장으로 자금이 쏠리는 과열 양상을 보이자 2005년 10월부터 징검다리식으로 세 차례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그는 특히 선제적 대응을 중시했고 시장에 시그널을 주는 방식으로 관리하는 노련함도 보여줬다.

하지만 그는 때론 절제되지 않은 발언을 함으로써 '설화(舌禍) 총재'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부동산 파동이 한창이던 2003년 9월 강남 집값을 잡기 위해서는 대학입시 제도부터 뜯어고쳐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으며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외환시장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란 입장을 밝힌 것으로 보도돼 금융시장을 출렁거리게 만들었다.

◆물가안정을 꿈꿨으나

이성태 총재는 한국은행법의 설립 목적인 '물가안정'에 충실했다.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간 물가상승률을 3.3%로 묶었다. 국제유가가 급등락하는 와중에 물가가 목표범위(3.0±0.5%)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인플레이션 파이터'였던 이 총재는 그간 물가안정 등 한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정부와의 충돌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은 독립 투사'라는 별명도 얻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았고,금융 안정을 위한 신속하고 과감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은 오점으로 남았다.

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