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6천여 명의 관중이 '올림픽 피겨퀸'으로 탄생한 김연아(20.고려대)에게 찬사의 기립박수를 보낼 동안 관중석에서 숨죽여 지켜보던 어머니 박미희(51) 씨와 아버지 김현석(53) 씨의 눈가는 기쁨으로 촉촉이 젖어들었다.

김연아(20,고려대)가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에서 한국인 선수로는 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한국 피겨 110년 역사를 새롭게 써내렸다.

7살 때 처음 스케이트를 시작해 TV를 통해 본 미셸 콴(미국)의 모습에 반한 어린 소녀가 막연히 품었던 올림픽 금메달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 14년 넘게 '피겨퀸'을 정신적으로 지탱해준 어머니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김연아가 한국인 사상 처음으로 동계올림픽 정상에서 설 수 있었던 원동력은 가족의 헌신과 사랑이다.

김연아가 1996년 피겨스케이트에 처음 입문하면서부터 '피겨맘'으로서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한 어머니 박미희(51) 씨는 이날 금메달로 지난 14년간의 고생을 한순간에 잊었다.

7살의 유치원생이었던 김연아는 과천 아이스링크에서 특강을 통해 본격적으로 피겨를 시작했고, 고모가 선물한 낡은 빨간색 피겨 부츠로 초등학생 언니들과 어울려 피겨의 맛에 푹 빠졌다.

이때 김연아의 첫 스승이었던 류종현 코치가 어머니에게 선수 입문을 권유하면서 어머니의 고민이 시작됐지만 고심 끝에 김연아에게 '피겨 선수의 길'을 열어줬다.

김연아가 피겨 선수의 길을 걷는 순간부터 어머니 박미희 씨도 '피겨맘'으로써 고난 행군을 시작했다.

어머니와 김연아의 첫 시련은 사춘기가 찾아온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맘껏 뛰노는 친구들과 떨어져 매일 빙상장과 학교를 오가며 어머니와 온종일 붙어 있어야 했던 김연아는 운동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김연아의 투정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김연아가 다시 링크로 돌아올 수 있게 다독였고, 마침내 2003년 김연아가 최연소 국가대표 발탁되는 기쁨을 맛봤다.

또 한 번의 시련은 IMF 사태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레슨비와 대관비에 큰돈이 들어가는 피겨를 계속시키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박미희 씨는 김연아의 기를 죽이지 않으려고 내색도 않고 뒷바라지에 전력을 쏟았다.

실제로 지난 2006년에는 스케이트 부츠가 자꾸 망가지면서 어머니는 김연아의 은퇴를 심각하게 생각했다.

2006년 11월 시니어 무대에 진출하고 나서 첫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했을 때 박미희 씨는 "다른 선수들은 스케이트 부츠 1켤레를 서너 달씩 신는데 연아는 한 달도 못 신는다"라며 "이번 시즌은 부상도 있었고 정말 어렵게 준비했다.

두 달 전에는 은퇴까지 생각했었다"라며 밝혔다.

시련을 이겨낸 김연아는 2007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브라이언 오서 코치와 안무가 데이비드 윌슨의 지도 속에 해외 전지훈련을 시작했고, 어머니는 가족과 떨어져 김연아와 함께 낯설고 물 선 캐나다 생활을 시작했다.

마음 놓고 훈련할 기회를 얻었지만 김연아는 그해 허리 통증이 심해져 도쿄 세계선수권대회에 진통제를 맞고 출전하는 '부상 투혼'을 펼쳤고, 이듬해에는 고관절 부상으로 고생했다.

아픈 딸이 통증을 참고 훈련하는 모습을 보며 박 씨는 남몰래 눈물을 삼켰고, 마침내 2009년 2월 4대륙선수권대회 우승에 이어 한국인으로선 첫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을 따낸 딸의 모습을 보며 기쁨을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전한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가 금메달의 영광을 차지했고, 그 순간 관중석에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딸의 연기를 지켜보던 어머니의 머릿속에선 지난 14년 동안 딸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고생의 기억이 눈녹듯 사라졌다.

(밴쿠버연합뉴스) 이영호 기자 horn90@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