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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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시각효과 주객전도된 '아바타'
3D 기술공학의 가공할 파워 보여줘
3D 기술공학의 가공할 파워 보여줘
오랜만에 극장 나들이를 했다. 제임스 캐머론 감독의 화제작 '아바타'를 보기 위해서였다. 주위 사람들이 2D로 보면 후회한다고 해서 부득이 서울에서 떨어진 일산까지 가서 그것도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야 겨우 3D로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3시간 가까운 상영 시간 동안 나는 영화를 봤다기보다 3D의 마술에 걸려 있었다고 해도 될 정도로 그 특수효과에 매료돼 버렸다. 어둠 속에서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내내 그 나머지,그러니까 이 영화의 스토리나 주제 등은 내게 부차적인 수준을 넘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 영화의 경우 어떤 내용을 보다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해 그런 시각효과가 동원되었다기보다는 그런 시각효과를 펼쳐보이기 위해 이야기를 그렇게 풀어나갔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할리우드가 새롭게 제조해낸 이 현혹적인 신기루에 압도된 채 극장문을 나서는 내 머릿속에 오가는 생각은 영화기술이 드디어 또 하나의'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혔구나 하는 것이었다. 사실 영화 그 자체만 놓고 이야기한다면 '아바타'는 같은 SF 계열의 작품인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나 '블레이드 러너''솔라리스' 같은 작품에 비해서도 완성도나 예술성이 크게 처진다고 볼 수밖에 없다. 내러티브는 성기고 캐릭터는 만화적 단순성을 벗지 못하고 있으며 표방하고 있는 주제 역시 뻔했다. 침략적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나 생태주의에 대한 찬양은 우리 시대에 유행하는 지적 풍조로서 이 영화 속에선 별다른 진정성이나 부채감 없이 유행적으로 차용된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물론 이 영화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생산할 수 있는 요소들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그 요소들은 주도면밀한 계산이나 뚜렷한 목적의식 하에 작품 속에 융합돼 있다기보다는 편의적으로 뒤섞여진 채 적당히 분위기만 풍기는 상태로 제시돼 있을 뿐이다. 거기서 우리 시대의 어떤 징후를 끌어내거나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을 읽어내려고 하는 노력은 공연한 헛수고에 그칠 위험이 크다.
이 영화는 만화와 실사의 경계를 허문 것처럼 신화적 판타지와 정치적 알레고리를 뒤섞고 기술공학과 생태주의의 외피를 둘러쓴 신비주의를 뒤섞어 놓고 있다. 이런 무차별적 잡종성은 이 영화의 대중성이 어떤 철학적 근거를 갖고 있느냐 하는 물음에 대해 고개를 젓게 만든다.
인간이 자연에 가하는 물리적 폭력을 고발하고 생태주의를 고취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외양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엄청난 대중적 성공을 가져다준 것이 결국 3D의 기술공학이라는 사실은 단순한 역설이 아니다.
영화에서 인간은 판도라라 이름 붙여진 행성에서 자원 탈취를 위한 전쟁에 나선다. 대대적 공습 앞에서 절멸의 위험에 처한 판도라의 자연과 주민을 구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아바타로 변신한 한 인간의 노력이다. 메시아 신앙에 기초한 영웅서사라는 익숙한 장치가 낯선 행성에서 다시 한번 작동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판도라는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에게 불,즉 지식이나 과학을 가져다준 것에 대한 벌로 제우스가 인류에게 보낸 선물이다. 태생적으로 판도라라는 이름엔 지성이나 과학기술에 반대되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아바타'는 새로운 영화적 기술공학의 힘을 과시하며 판도라의 상자에 대한 신화를 재생산하고 있다. 일단 상자가 한번 열리고 나면 그 파급효과는 걷잡을 수 없다. 영화 속에서 판도라는 인류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받으며 그 신비를 유지하지만 영화 밖에서 보자면 3D라는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려졌다. 거기서 누군가는 희망을 보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재앙만을 볼지도 모른다.
남진우 < 시인ㆍ명지대 교수 >
3시간 가까운 상영 시간 동안 나는 영화를 봤다기보다 3D의 마술에 걸려 있었다고 해도 될 정도로 그 특수효과에 매료돼 버렸다. 어둠 속에서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내내 그 나머지,그러니까 이 영화의 스토리나 주제 등은 내게 부차적인 수준을 넘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 영화의 경우 어떤 내용을 보다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해 그런 시각효과가 동원되었다기보다는 그런 시각효과를 펼쳐보이기 위해 이야기를 그렇게 풀어나갔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할리우드가 새롭게 제조해낸 이 현혹적인 신기루에 압도된 채 극장문을 나서는 내 머릿속에 오가는 생각은 영화기술이 드디어 또 하나의'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혔구나 하는 것이었다. 사실 영화 그 자체만 놓고 이야기한다면 '아바타'는 같은 SF 계열의 작품인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나 '블레이드 러너''솔라리스' 같은 작품에 비해서도 완성도나 예술성이 크게 처진다고 볼 수밖에 없다. 내러티브는 성기고 캐릭터는 만화적 단순성을 벗지 못하고 있으며 표방하고 있는 주제 역시 뻔했다. 침략적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나 생태주의에 대한 찬양은 우리 시대에 유행하는 지적 풍조로서 이 영화 속에선 별다른 진정성이나 부채감 없이 유행적으로 차용된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물론 이 영화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생산할 수 있는 요소들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그 요소들은 주도면밀한 계산이나 뚜렷한 목적의식 하에 작품 속에 융합돼 있다기보다는 편의적으로 뒤섞여진 채 적당히 분위기만 풍기는 상태로 제시돼 있을 뿐이다. 거기서 우리 시대의 어떤 징후를 끌어내거나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을 읽어내려고 하는 노력은 공연한 헛수고에 그칠 위험이 크다.
이 영화는 만화와 실사의 경계를 허문 것처럼 신화적 판타지와 정치적 알레고리를 뒤섞고 기술공학과 생태주의의 외피를 둘러쓴 신비주의를 뒤섞어 놓고 있다. 이런 무차별적 잡종성은 이 영화의 대중성이 어떤 철학적 근거를 갖고 있느냐 하는 물음에 대해 고개를 젓게 만든다.
인간이 자연에 가하는 물리적 폭력을 고발하고 생태주의를 고취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외양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엄청난 대중적 성공을 가져다준 것이 결국 3D의 기술공학이라는 사실은 단순한 역설이 아니다.
영화에서 인간은 판도라라 이름 붙여진 행성에서 자원 탈취를 위한 전쟁에 나선다. 대대적 공습 앞에서 절멸의 위험에 처한 판도라의 자연과 주민을 구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아바타로 변신한 한 인간의 노력이다. 메시아 신앙에 기초한 영웅서사라는 익숙한 장치가 낯선 행성에서 다시 한번 작동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판도라는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에게 불,즉 지식이나 과학을 가져다준 것에 대한 벌로 제우스가 인류에게 보낸 선물이다. 태생적으로 판도라라는 이름엔 지성이나 과학기술에 반대되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아바타'는 새로운 영화적 기술공학의 힘을 과시하며 판도라의 상자에 대한 신화를 재생산하고 있다. 일단 상자가 한번 열리고 나면 그 파급효과는 걷잡을 수 없다. 영화 속에서 판도라는 인류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받으며 그 신비를 유지하지만 영화 밖에서 보자면 3D라는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려졌다. 거기서 누군가는 희망을 보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재앙만을 볼지도 모른다.
남진우 < 시인ㆍ명지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