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를 줘야 하나. 설날 차례를 지내고 나서 세배를 받으려면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

세뱃돈 평등의 원칙'에 따라 나이 불문하고 같은 액수를 주자니 뭔가 개운치 않다. 초등생이야 그렇다 쳐도 고교생 조카에게 달랑 1만원짜리 한 장 내밀려면 주변 시선에 낯이 뜨거워진다. 그렇다고 몇 만원씩 덥석 쥐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적게 주자니 체면이 말이 아니고 넉넉하게 주자니 지갑이 얇아지는 형국이다.

민속학자들은 우리 세뱃돈의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본다. 19세기 조선의 풍습을 망라해 편찬된 '동국세시기'에도 세뱃돈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래서 20세기 들어 중국이나 일본에서 건너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설날 아침 새 돈을 붉은 색 봉투에 넣어 '돈 많이 벌라'는 덕담과 함께 건넸다. 이를 압세전(壓歲錢)이라 했다. 일본 세뱃돈 풍습은 에도시대(17~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지역에서만 유행하다가 전국적으로 퍼진 것은 1960년대 이후부터라고 한다. 새해를 상징하는 연이나 매화가 그려진 봉투에 돈을 넣어 준다. 몽골에서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세뱃돈을 드리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선물을 건네는 풍습이 전해져 온다.

사는 게 달라지면서 세뱃돈 주는 방식도 바뀌고 있다. 예금이나 펀드에 가입했다가 설날 아침 자녀들에게 건네는가 하면 국제경제감각을 길러준다는 뜻에서 일부 은행이 내놓은 달러화 · 유로화 등 5가지 외화(外貨)로 구성된 선물세트(정액형 1만7000~5만원)를 주는 경우도 있다. 온라인 교육사이트 수강권,도서상품권 등으로 세뱃돈을 대신하기도 한다. 금이 액운을 막아준다는 속설에 착안해 새해 덕담을 새긴 '골드 바 기프트 카드'도 나와 있다.

한 뼘씩 커버린 아이들이 세뱃돈 받아들고 즐거워하는 모습엔 절로 미소가 지어지지만 부쩍 기력이 쇠한 어른들을 뵙노라면 마음이 무거워 진다. 직장 잃은 삼촌,원하는 대학에 못들어간 조카도 안쓰럽다. 그래도 가족 친지가 모여앉으면 왁자하게 웃음꽃 피우며 시름을 잊게 마련이다. 그렇게 서로를 보듬으며 다시 설을 맞는다. '오늘 아침/따뜻한 한 잔 술과/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그것만으로도 푸지고/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한 해가 가고/또 올지라도/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고운 이빨을 보듯/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김종길 '설날 아침에'중).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