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정상(Summit)'을 회담과 엮어서 외교적으로 처음 사용한 사람은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였다는게 정설이다. 처칠은 1950년 에든버러 연설에서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회담을 제의하며 이 단어를 꺼냈다. 이후 국가 최고 지도자 간 회담을 지칭하는 것으로 뿌리 내렸다.

처칠 총리가 왜 '정상'이란 말을 붙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외교 용어로 치환된 이 단어에는 긴박성이 묻어난다. 각 정상은 서로 나라 운명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벼랑끝에서 마주한다. 고도의 협상 전술을 바탕에 깔고 물러설 수 없는 한판승부를 통해 '화룡점정'을 찍는다. 특히 총부리를 겨누는 적대관계에 있다면 준비에서 성사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는 게 다반사다. 때문에 회담이 이뤄진다는 자체만으로도 상징하는 바가 크다. 남북정상회담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10년 전인 2000년 6월13일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에서 '주적' 북한 인민군의 분열과 신고를 받았다. 이걸 지켜보고 감격에 겨워했을 국민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김 대통령도 남으로 돌아온 뒤 "이제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고 단언했다. 그렇지만 북한은 보기좋게 배신했다. 정확히 2년 후인 2002년 6월 연평도 앞바다에서 2차 도발을 감행했다. 그 해 10월 2차 북핵 위기를 불러왔다. 정상회담 파트너였던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가 채 끝나지 않은 때였다. 2006년 9월엔 1차 핵실험을 실시,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은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임기를 몇 달 남기지 않아 회담의 유용성에 대한 논란이 제기됐지만 노 대통령은 "전임 사장이 발행한 약속어음은 후임 사장이 결제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노 대통령은 "군사분계선을 넘는 순간이 저한테 허락됐다는 것이 무척 행운이었다"고 회고했다. 북한으로부터 돌아온 것은 역시 핵실험과 3차 서해교전,대륙간탄도미사실 발사였다.

두 번의 정상회담은 '우리 민족끼리''화해협력'에 바탕을 둔 공동선언을 내놨으나 정작 북핵 문제 실마리를 푸는 데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결과적으로는 만남 자체가 강조된 회담이 돼 버렸다.

최근 남북정상회담 추진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청와대는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지난해 10월 임태희 노동부 장관과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 간 비밀 접촉설이 불거졌을 때만 해도 강력 부인했던 청와대는 이제 "분위기는 무르익고 있다(박선규 대변인)"고 말한다. 청와대 관계자는 "공은 북한에 가 있다"고 말했다. 장소,조건 등 회담에 관한 우리 입장을 북한에 던져놓고 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다. 여러 설들이 난무하자 이명박 대통령이 "대가는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양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대전제를 제시하면서도 회담 추진 자체는 부인하지 않았다. 시기적 급박성이 바탕에 깔려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올해를 넘기면 사실상 동력이 없어진다"고 했다.

문제는 정상에서 어떻게 내려오는지가 중요하다. 정상회담 준비와 협상 못지않게 실천이 관건이라는 것은 지난 두 차례의 회담이 잘 보여주고 있다. 만남 자체가 강조된,실천이 담보되지 않고 '출구전략'이 없는 회담은 실패작이 될 가능성이 높다.

홍영식 정치부 차장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