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인단체의 이사회에 갔다. 회장은 나와 형 · 아우 할 정도로 임의로운 사이였다. 회장이 관례에 따라 먼저 회의록을 작성할 서기를 정한 뒤 개회를 선언했다. 회의를 진행해가는 회장의 얼굴이 밝았다. 4년 임기를 마치는 마지막 이사회라서 짐을 내려놓는 홀가분함 때문에 저렇겠지 했다. 그런데 결산 내용을 보고하는 순서에서 다른 까닭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1억2000만원이나 남겨서 차기 집행부에 넘겨주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사들 모두가 놀라워했다. 4년 전에 회장이 전 집행부에서 넘겨받은 돈이 한푼도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서였다. 다른 문인단체들도 대부분이 그런 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도 해서일 것이다.

나는 회장을 칭찬하고 싶었다. "임기 중에 회원들이 회비를 다 내준 것도 아니고,어디서 목돈을 지원받은 것도 아닌데,해야 할 일을 다해오면서 어떻게 그만한 돈을 남길 수 있었는지요. 혹시 그러기 위해 회장님 집을 팔기라도 한 것 아닙니까. " 이사들 모두가 크게 웃었다. 회장도 웃었다. 그냥 칭찬만 하자니 분위기가 딱딱해질 것 같아,말끝에 우스갯소리를 붙인 것이 모두를 즐겁게 한 것이다. 또 회장에게는 최고의 찬사가 된 듯했다. 나는 흡족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2주쯤 뒤 어느 모임에서 회장을 만났을 때였다. 대뜸 나한테 짜증부터 냈다. 그 이유를 물었다. 내가 아무데서나 함부로 우스갯소리를 해대니까 그걸 오해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앞으로는 좀 자제하라는 당부였다. 나는 좀 자세히 말해 보라고 했다. 회장은 내가 지난번 이사회에서 쓰잘데 없이 집을 팔았느니 어쨌느니 해가지고 자기가 곤혹스러워졌다고 했다. 그때 모두가 즐거워하지 않았느냐,회장도 같이 웃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회장이 그것은 인정한다고 했다. 그런데 회의록에 그 상황을 어찌 기록하겠는가. 그래서 오해가 생겼다고 했다.

말을 다 들어본 나는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회의록에는 안건에 관계된 극히 사무적인 내용만 기록하기 때문에,모두가 크게 웃음을 터뜨린 사항을 기록자가 어찌 해야 할지 몰라 빼버린 것이다. 그러니 마치 회장이 돈을 마련할 목적으로 집을 팔기라도 한 것처럼 돼 있더라 했다. 연극 대본 같은 데서처럼 '(큰 웃음)'으로 표기했더라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나는 기록자가 그렇다 하더라도 회장은 달랐어야 했다고 우겼다. 내가 발언했을 때,"과찬이십니다. 제가 그런 정도의 인물이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든지,이와 비슷한 수준으로 받았더라면 회의록에 괄호속의 큰 웃음이 없다 하더라도 오해가 없었을 것 아니냐고 했다. 회장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뒷머리를 긁었다. 그때 그냥 웃기만 한 자신이 좀 그렇다는 생각을 한 듯했다. 웃음이 괄호 밖으로 나와서 소리낸다 해도 오해 없는 세상,그런 세상을 그려본다.

이상문 제지공업연합회 이사장·소설가 kpma@pap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