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조 때 낙안군수 유이주(柳爾胄)가 세웠다는 전남 구례 운조루(雲鳥樓)에는 빼어난 풍광 못지않게 유명한 쌀 뒤주가 있다. 두 가마 반 정도의 쌀이 들어가는 뒤주의 마개 부분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 · 다른 사람도 마음대로 열 수 있다)'라는 글자를 써놓았다. 주인의 간섭 없이 필요한 사람들이 알아서 쌀을 퍼가도록 한 것이다.

조선후기 성리학자 윤증(尹拯) 가문도 추석 무렵에는 추수한 벼의 일부를 바로 곳간으로 옮기지 않고 일부러 대문 밖에 쌓아 놓았다고 한다. 양식이 부족한 사람들이 슬쩍 벼를 가져가도 눈감아 주기 위한 조치였다. 가난한 이들의 자존심과 체면까지 배려한 마음이 돋보이는 사례들이다. 많든 적든 애써 모은 재산을 남에게 내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재물은 아무리 많아도 성에 차지 않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눔은 쓰고 남는 것으로 하는 게 아니라 먼저 준 다음 줄여 써야 한다는 말도 나왔을 게다.

'방황하는 자들을 위한 안내서'라는 책을 쓴 중세 철학자 겸 의학자 모세스 마이모니데스는 자선의 등급을 8단계로 나눴다. 가장 낮은 단계는 '마지못해 주고 나서 후회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주기는 하지만 요청한 것보다 적게 주는 것'이다. 이렇게 등급이 올라가다가 '주는 이나 받는 이나 서로 모르는' 진정한 나눔의 경지에 이른다. 하지만 최고 단계는 '받는 이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라 했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이 강진으로 폐허가 된 아이티 지원에 잇달아 나서고 있으나 일부에선 향후 아이티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위한 과열경쟁의 양상을 띠는 모양이다. 미국 프랑스 브라질 등 대규모 지원국들 간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며 때론 노골적인 비방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고 한다. 겉으로 인도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정치 · 경제적 계산이 복잡하게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냉혹한 국제질서에서 국가간 조건 없는 도움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아이티는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고 생존한 사람들도 절망에 빠진 채 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는 극한 상황에 처해 있다. 유이주 · 윤증 가문 처럼 격조 있는 도움을 주지는 못할 망정 지원을 매개로 볼썽사나운 모습을 과하게 드러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유명무실한 행정력에 국민의 80%가 실업자라는 아이티가 이번 재앙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진심으로 돕는 게 우선이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