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하나만 뚫려 있는 나지막한 집이 얼어붙은 듯 땅에 엎드려 있다. 그 옆으로 나무 네 그루. 그림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노송의 몸통은 썩어 있고 휘어진 가지 끝엔 겨우 솔잎 몇 개가 붙어 있다. 이 게 전부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한겨울의 냉기가 살을 찌를 듯 그림의 여백을 휘감고 있을 뿐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이 그림은 익히 알려진 대로 당쟁에 휘말려 제주도로 유배된 추사가 그의 오랜 지우(知友) 이상적을 위하여 그린 것이다. 이상적은 역관 신분을 이용, 청에 들를 때마다 그곳 지식인들의 근황과 그들의 저서들을 수집하여 추사에게 보내왔다. 한반도 남단의 외진 땅에서 추사가 청대의 지식인들에게 버금가는 19세기 최고의 국제 감각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이상적의 우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추사 역시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는 '세한도'를 통해 자신의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낯선 땅으로 추방된 자의 좌절과 고독을 드러내는 한편, 그런 그를 잊지 않고 여전히 친교를 이어가고 있는 친구의 우정에 감사했다. '세한도'는 우리가 잊고 있던 이 덕목들을 새삼 일깨우는 측면이 있다. 우리가 이 그림을 조선 문인화의 최고봉이라고 일컫는 데는 이런 맥락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이 그림에 관한 또 다른 독법이 이야기되고 있어 흥미롭다. 추사연구가 박철상은 '세한도'에 관한 최근의 저서를 통해 이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림에 드러나 있는 것보다 드러나 있지 않은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한 개인의 고적한 심사는 이 그림의 핵심이 아니다. 오히려 이 그림에는 유배객의 처지를 뛰어넘는 조선 후기 지식인의 호기와 세계에 대한 입장, 당대 트렌드를 읽어내고 재창조하는 안목과 세련미가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그림의 정수(精髓)로 이제까지는 부수적인 장치들로 이해되었던 것들, 예컨대 유배객의 처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거친 질감의 종이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넣은 예서체의 제목 '세한도'를 둘러싼 문헌상의 비교문학적 맥락들, 네 곳에 각기 다른 형태로 찍혀 있는 붉은 인장의 의미, 그리고 그림의 왼편에 따라붙어 있는 추사의 서문 등을 든다.

무엇보다도 그가 가장 크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그림에 이어 붙여진 '제영'이다. 추사의 그림을 받은 이상적은 크게 감동하여 연행길에 이 그림을 들고 가서 청의 문인들에게 보인 후 그들의 감상평을 받아 그림에 이어 붙여 놓았다. 이 감상기를 '제영'이라고 부른다. 박철상은 이 제영을 논외로 하고서는 '세한도'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새롭게 다가오는 서양문화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기울어져 가는 문명권에 속한 자의 한탄을 감출 길 없었던 19세기 말 조선과 청의 지식인들은 '세한도'를 통해 은밀하고도 섬세하게 서로의 내면을 공유하게 되었다. '세한도'의 제영 속에는 이 문명사적 사건이 고스란히 담겨 있게 된 것이다. '세한도'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 그것은 바로 이 숨막히는 장면이 환기하는 기쁨과 슬픔을 확인하는 것,바로 그 당대인들의 숨결을 귓가에 되살려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새해다. 한파가 새해 벽두부터 한반도를 강타하고 있다. 이 추위 속에 '세한도'를 생각한다. 출구가 막힌 집을 지키는 썩어가는 노송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한 지식인의 정신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당대의 공감을 넘어 오늘날까지도 영원히 살아남았다. 혹한의 시간을 견디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세한도'가 문득 궁금해지는 까닭이다.

신수경 < 문화평론가.명지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