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누군가 담 넘어와/ 마당에 발자국을 남기고 갔다…/ 소리 없이 문이 열려 있다. / 담장에 세워둔 비 집어들고… 이상하다/ 뒤꼍에 숨어 있는 옆집 강아지가 마음 속에 보인다. / 그의 젖은 새카만 콧등/ 눈 위의 발자국을 비로 쓸어낸다. '

황동규 시인의 '누가 몰래 다녀갔을 때'이다. 시(詩) 속의 눈,마당과 장독대에 소복소복 쌓이는 눈은 이렇게 고요하고 아름답다. 뿐이랴.따뜻한 실내에서 바라보는 가로수의 눈꽃은 황홀하고,멀리 보이는 설산(雪山)은 눈부시고,TV에 비친 고궁의 눈밭은 더없이 환상적이다.

산타의 고향으로 유명한 핀란드 북부 작은 마을 로바니에미의 경우 매년 60만명 이상이 찾는다는 데서 보듯 하늘과 땅이 온통 하얀 가운데 불빛 반짝이는 그림같은 풍경은 사람의 발길을 끌어모으는 요소다. 그러나 도시,특히 거리에 쏟아지는 눈은 마냥 반가울 수만은 없다.

최근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쏟아진 폭설은 눈의 무서움을 절감하게 했다. 이대로 계속 춥거나 다시 눈이 내리면 어쩌나 싶더니 다행히 추위는 누그러지고 한낮 햇볕이 따사로우니 큰 길 양쪽에 잔뜩 쌓였던 눈은 거의 녹고,보도와 이면도로와 골목길도 군데군데 바닥이 드러났다.

겨우 한나절 내린 눈으로 서울이 엉망진창이 된 데 화들짝 놀랐을까,소방방재청이 내집 앞 눈을 치우지 않을 경우 최대 100만원의 과태료를 매기는 법안을 마련하겠다고 나섰다. 지금도 지자체 조례에 '내집 앞 눈 치우기' 규정이 있지만 실효성이 없으니 강제하겠다는 것이다.

하염없이 남는 눈을 치우랴,쏟아지는 비난을 감내하랴 몸과 마음 고생 모두 심했을 게 틀림없다. 같은 일이 또 생기면 어쩌겠느냐는 질문 앞에 답답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파트와 대형건물은 지금도 알아서 치운다. 문제는 단독주택과 소형 상가 등인데 단독주택에 사는 나이든 이들과 맞벌이 부부는 치우고 싶어도 못 치운다. 구멍가게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몇몇 선진국의 예를 들고 미국에선 집앞 눈을 치우지 않아 사고가 나면 집주인에게 책임을 지운다는 얘기도 곁들였다. 서래마을 언덕엔 열선을 깔아 눈이 쌓이지 않도록 만들었다고 하거니와 그렇게까진 못해도 미리미리 잘 대비하고 즉각 치우는 게 먼저다. 우리 동네 눈은 우리가 치우자는 캠페인을 강화하는 정도라면 몰라도 과태료를 물리겠다는 발상은 씁쓸하기 짝이 없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