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살 늦은 나이에 발레에 입문해 "우리 과(선화예술학교 발레과) 열아홉명 중 내가 분명 19등이겠지?운이 좋으면 18등이려나?"하고 염려하던 소녀가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놀라웠다. 발레 경력 1년 남짓인 소녀가 더 먼저 시작한 친구들을 모두 제치고 실기시험에서 1등을 차지한 것.무서운 속도로 성장한 소녀는 2003년 스위스 로잔콩쿠르에서 입상하며 발레계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이후 세계 최정상급 발레단인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에 입단,코르 드 발레(군무)를 하다 올 7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한국인 최초로 ABT 전막 주역을 차지하는 저력을 과시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발레리나 서희(23).그는 내년에도 ABT의 주역으로 무대에 설 기회를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 그가 유니버설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을 통해 국내 발레 팬들을 처음으로 만난다. 25일,27일 저녁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 무대에서다. ABT의 수석 무용수인 마르셀로 고메즈(29)와 함께다.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유니버설발레단 연습실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서희처럼 아름다운 무용수를 본 적이 없다. 서희는 나이를 뛰어넘어 경험한 것 이상을 표현할 수 있는,기술과 상상력을 동시에 갖춘 타고난 발레리나다. "(고메즈) "ABT에서도 A급 수석 무용수인 고메즈에게 입단 초기에는 무서워서 감히 말도 붙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함께 춤을 추면 너무 좋아서 눈을 감게 된다. "(서희)

서희와 고메즈가 크리스마스에 한국 무대에 나란히 서게 된 이유도 각별하다. 이들이 처음 호흡을 맞춘 건 지난해 ABT의 '데지(De?Jsir)'무대.이때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던 고메즈는 고국인 브라질의 '호두까기 인형'에서 자신의 상대역으로 서희를 지목해 이번 달에 이미 같은 무대에 올랐다. 서희도 한국의 '호두까기 인형' 상대역으로 고메즈를 불렀다. 바쁜 스케줄에도 두말없이 서희의 요청에 응한 고메즈는 23일 한국에 입국하자마자 리허설을 하고 바로 무대에 서는 빡빡한 일정을 흔쾌히 소화했다. 보통 크리스마스는 브라질에서 가족과 보내는 고메즈지만 올해에는 서희 때문에 지구의 반대편 한국에서 성탄을 맞이하게 됐다. 그러자 서희는 "올해에는 내가 고메즈의 가족이 되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세 번째로 방한한 고메즈는 "한국 음식을 좋아하고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아 뉴욕의 한인 타운에도 자주 가는데,이번에 또 진짜 한국을 체험하게 돼서 기쁘다"고 했다. 음식 이야기가 나오자 어릴 때부터 해외 생활을 했던 서희는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나이가 들면서 '역시 한국인은 밥심이야!'라는 생각이 들며 한국 음식이 절실해진다"고 덧붙였다.

'제2의 강수진'이란 별명이 붙은 서희는 야무지게 각오를 밝혔다. "국내 발레 팬들은 저를 로잔콩쿠르의 어린 소녀로 기억하세요. 그러나 이제는 어린 유망주가 아닌 성숙한 발레리나로 인사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강수진 선배를 매우 존경하기 때문에 '제2의 강수진'은 과분한 호칭이죠.저도 언젠가는 그렇게 되고 싶어요. 하지만 저는 그냥 서희였으면 좋겠어요. "

이들은 발레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다. 고메즈는 "발레는 내 인생의 모든 것,내가 사랑하는 발레를 매일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했다. 서희는 자신감이 넘쳐보였다. "무대에서 내가 갖고 있는 것 이상을 보여주려고 한 적이 없어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자신감이 있거든요. 무대에서 편안하게 춤을 출 수 있는 자신감이 저의 강점이라고 생각해요. 열심이라는 말이 심장에서 열이 난다는 뜻이라면서요? 발레를 할 때 제 심장에서 열이 나고 가슴이 뜨거워져요. 그 느낌 때문에 발레를 합니다. "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