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시대 낙원은 ‘젖과 꿀이 흐르는’땅으로 묘사됐다. 근대초까지 인류는 달콤한 게 도대체 어떤 맛인지 잘 모르고 있었고 단맛을 접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꿀은 낙원을 상징하는 맛이 된 것이다. 단맛의 거의 유일한 원천인 꿀은 오랫동안 양이 적은 희소한 사치식품이었다.

이같은 상황에 변화를 가져온 단맛의 대중화를 가져온 식물은 설탕의 원료가 되는 사탕수수였다. 사탕수수는 겐지스 델타와 아샘 지방 사이 뱅골연안이 원산지로 기원전 300년 인도에서 재배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어 사탕수수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처방전에도 등장하고 비잔티움에서도 꿀과 경쟁하는 위치가 되면서 식품이라기 보다는 약제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고 한다.



중근동 지역 외에도 광둥성을 중심으로한 중국과 일본으로도 사탕수수가 퍼졌다. 하지만 이 사탕수수를 처음으로 대규모로 재배한 것은 아랍인들이었고, 그 결과 생산된 이집트산 설탕은 최고의 생산품으로 여겨졌다.

아랍인들은 이어 이베리아반도로 사탕수수 재배지를 넓혔고, 유럽인들은 아랍과의 투쟁의 과정속에서 사탕수수를 접하게 된다. 유럽인들이 사탕수수를 처음 본 것은 10세기 십자군 원정에서 십자군들이 시리아에서 처음 접한 게 기록상 가장 앞서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10세기 살레르노 학파의 약전에도 설탕이 등장하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여러 루트로 설탕과 사탕수수를 접했던 것 같다.

곧이어 설탕의 가치를 알아본 베네치아 상인들이 중세 유럽의 대표적 사치품이된 설탕교역을 장악했다. 근대에 접어들 무렵엔 이탈리아 상인들과 결탁한 포르투갈인들이 아프리카 해안의 조그만 섬인 상 투메에서 설탕생산을 ‘혁명적’으로 발전시킨다. 인류 역사상 가장 끔직한 혁명중 하나인 포르투갈인들의 설탕혁명은 바로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잡아와 설탕 플렌테이션에서 강제노역을 시킨 것이었다. 기계가 제대로 발달되지 않은 시기에 설탕제조와 관련된 고된 노동은 인간의 노동력을 극한까지 짜내는 고전적인 잔인한 방식에 의해 작동됐다. 사탕의 제조과정에는 사탕수수를 꺽어서 으깬 뒤 즙을 오랜시간 끓여야 했는데,그 과정이 매우 고통스러웠을 뿐 아니라 사탕수수즙을 끓이기 위해선 수많은 나무를 벌목도 해야했다. 이는 유럽에서도 사라져가던 노예제가 신대륙에서 부활하는 계기가 됐다.“설탕이 없었으면 니그로도 없었다”는 말도 이를 계기로 나왔다. 결국 상 투메라는 조그만 섬은 포르투갈 귀족과 이탈리아 상인들에겐 천국이었지만 수만명의 노예들에겐 지옥의 아비규환의 장이 됐다.

16세기 유럽은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고,그 결과 단맛을 즐길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도 늘었다.설탕을 두고 “이전에는 약으로나 쓰던것이 이제는 음식이 됐다”는 말도 나돌았다.이처럼 수요가 늘자 포르투갈은 대서양 건너 브라질에도 사탕수수를 심어 설탕생산을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사탕수수는 공식적으로는 1530년 마르팅 아퐁수 지 소우자에 의해 브라질에 들어온 것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에 도입됐고, 주로 브라질 동북부 해안지대에서 경작됐다. 이어 브라질 지역 특유의 플렌테이션 생산체제는 이지역만의 독특한 생산방식으로 자리잡았다. 사탕수수가 브라질에서 대량생산되게 된 것은 아시아의 작물과 유럽자본, 아프리카 노동력, 아메리카의 땅이 결합된 진정한 국제작물의 첫 케이스로 평가받기도 한다.

결국 유럽인들이 단것을 찾기 시작하면서 전세계 열대의 섬들은 하나씩 하나씩 울창하던 숲을 잃어갔다.대신 노예 플랜테이션이 그 자리를 덮어갔다.설탕값이 싸지고,대중화되면서 노예제는 부활하고,열대의 자연은 급속도로 파괴되어갔다.

이처럼 대량생산의 길에 접어든 설탕은 곧 인간의 식생활 전반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복합 탄수화물인 다른 식품들은 소화과정을 거쳐 자당으로 전환되는 반면,그 자체로 자당 덩어리인 설탕은 복잡한 중간 과정 없이 곧바로 열량을 얻을 수 있었다. 즉 먹자마자 힘을 쓸 수 있는 에너지원이었던 것이다.

이런 특성 덕분에 설탕은 산업혁명기 이후 노동자들의 값싼 열량 공급원 역할을 하게됐다. 잼을 바른 빵,비스킷,캔디 등 설탕이 가미된 음식들이 홍수를 이뤘고,차에 설탕을 듬뿍 넣어 마시는 습관이 일반화된 것도 노동자들이 열량을 추가로 공급받는 방식이 됐다. 설탕은 열등한 지위의 사람들의 생존을 보장해 주는 저급한 음식의 주재료가 된 것이다.한마디로 이전세대에 진과 맥주가 하던 수분과 열량 공급을 (취할 부작용도 없는)설탕을 넣은 차가 대신하게 됐다.결국 19세기말에 이르면 설탕은 전체 칼로리 섭취의 14%를 차지하게 됐다.

하지만 설탕은 노동계급 내에서도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에너지원이었다.그나마 가족의 생계를 짊어진 가장은 얼마안되는 동물성 식품을 주로 소비했고,나머지 가족들이 설탕 소비에 의존한 것이다.“고기는 오로지 아버지만 먹었으며,일하는 남편이 매일 베이컨을 먹는 동안 아내와 아이들은 일주일에 한번정도 고기맛을 보는데 만족했다”는게 19세기말 영국 노동자 가정의 일상이라는 것이다.

결국 영국에서 설탕은 가난한 노동자들이 칼로리 부족을 보충하는 데 도움이 됐고,산업혁명기 노동자들이 휴식시간에 가장 많이 먹는 식품이 됐다.

얼마전 인기 그룹 ‘소녀시대’ 멤버들의 식단이 공개돼 화제다.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기초대사량에도 못미치는 하루 800∼1200kcal 정도 밖에 먹지 못한다고 하니 500년전 전통사회의 서민들보다도 못먹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학창 시절 16세기 프랑스 농촌 서민들의 평균 섭취 칼로리는 1600kcal 안팎으로 추정된다고 배운 듯한 기억이다.정확한 수치는 아니다.)

반면 나의 식단을 되돌아 보면 설탕으로 떡칠된 정크 푸드들로 가득차 있다. 특히 사무실 내근을 하다보니 설탕이 잔뜩 들어간 커피믹스를 하루에도 여러잔씩 마시게 된다. 마감시간이 임박하거나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생기다보면 나도 모르게 책상옆에는 자판기 커피잔이 쌓여있고 각종 초콜렛과 산도,초코하임,초코파이,카스타드 등등에 손이 가곤 한다. 그 결과로 국제부 근무 1년도 안돼 이전보다 얼굴은 훨씬 토실토실해지고 배는 임신 8개월 수준이 돼 버렸다.

설탕이 약제는 커녕 정크푸드가 된 세상에서 단맛이라고는 구경도 못하는 소녀시대나,19세기 산업화 초기 노동자들 못지않게 곧바로 에너지로 전환되는 설탕섭취에 기대고 있는 나의 모습이나 인간적인 바람직한 삶에선 조금 거리가 있다는 느낌이다.


<참고한 책>
케네스 포메란츠·스티븐 토픽, 설탕,커피 그리고 폭력-교역으로 읽는 세계사 산책, 박광식 옮김, 심산 2003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일상생활의 구조 上, 주경철 옮김, 까치 1995
주경철, 대항해 시대-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Jonathan I. Israel, Dutch Primacy in World Trade 1585-1740, Oxford University Press 1992
Gary B. Nash, ‘Black People in a White People's Country’ in Stephen B. Oates(Edited),Portrait of America Vol.1, Houghton Mifflin 1994
Andre Gunder Frank, Dependent Accumulation and Underdevelopment, Monthly Review Press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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