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중국 국가부주석이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도 국빈급 대우를 받고 있다. 지난 16일 방한한 그는 이명박 대통령과 정 · 관 · 재계 주요 인사들을 만난 뒤 19일 미얀마로 출국한다. 56세의 시 부주석은 2012년 후진타오 국가주석에 이어 중국 최고지도자로 등극할 차기 주자.그는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시진핑 평전》은 그의 과거를 통해 중국의 현재와 미래를 엿볼 수 있는 키워드를 제시한다. 10년 전만 해도 '중국 공산당 원로인 시중쉰 전 부총리의 아들'이나 '군대 가수 펑리위안의 남편'으로 불리던 그가 공산당의 황태자로 자리잡은 건 불과 2년 전.후 주석이 덩샤오핑에게 간택돼 10여년간 2인자 자리를 굳힌 것과 대조된다.

시진핑을 황태자로 올려세운 것은 태자당(공산당 원로 자제)의 대부로 통하는 쩡칭훙 전 국가부주석으로 알려져 있다. 쩡 전 국가부주석은 "시진핑이 후진타오의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 직계 제자인 리커창을 뛰어넘어 황태자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우세는 각 방면에서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라며 원로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시대와는 달리 통치구조가 집단지도 체제로 바뀌는 현실에 적합한 통합형 지도자라는 점이 유효했다는 것이다.

'모든 계파가 거부감 없이 수용하는 인물'로 키운 건 그의 아버지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마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는 "단결은 절대적으로 패배하지 않는 영원한 전제"라고 말한다. 그가 좋아하는 인물도 문무를 겸비한 진시황 한무제 등이 아니라 지극한 정과 믿음으로 인화단결을 보여준 유방 유수 유비 송강 등이다.

푸젠성 닝더시 서기 시절 음력 정월 초하루 파리가 들끓는 화장장과 쓰레기 매립장을 돌며 노동자들과 손을 잡고 차를 마시는 친근함은 함께 간 기자들의 태도와 대조되기도 했다. 홍콩의 중국신문사 주임인 저자는 리커창이나 보시라이(충칭시 당서기)에 비해 재능은 별 차이 없지만 소탈하면서도 다정하고 청렴하면서도 신중함이 시진핑을 황태자로 만들었다고 분석한다.

상하이시 당서기로 발령받은 뒤 영국식 3층짜리 관사를 보고는 원로들의 요양원으로 하면 적합하겠다며 거부한 것이나 항저우로 가는 직행 전용열차를 마다하고 7인승 미니버스에 오른 건 몸에 밴 검소함 때문이다. 누나가 입었던 옷이나 붉은색 헝겊꽃신을 신게 한 아버지는 소년 시진핑이 친구들에게 놀림 받는다며 신지 않으려 하자 먹물을 들여 신게 했다.

조자룡의 고향 정딩에서 부서기를 맡던 때 신체를 단련하고 군중과 가까지워질 수 있으며 휘발유를 절약할 수 있다며 자전거를 타고 다닌 검소함도 여기서 비롯됐다. 작은 촌의 지도자 시절에 알게 된 농민이 20년 후 골수염으로 다리를 자르게 되자 물심양면 도와주고 임지를 떠난 뒤에도 다시 찾아가 전기문제를 해결하고,다리를 놓아주는 정을 보여준 것 역시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문화혁명 직전 아버지가 실각하면서 '반동의 자식'으로 찍혀 홍위병조차 될 수 없었던 그는 공산당 입당 신청을 했지만 열 번이나 퇴짜를 맞았다. 16세에 자원해 산시 북부의 황량한 황토고원으로 가 동굴 속에 살며 농촌노동에 나선 그는 이때를 '인민을 위해 실제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키우게 된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회고한다.

그는 전근 때마다 현지 주둔군을 위문하면서 군 기반을 다지는 노력도 했다. 인민해방군 최연소 문관장군으로,해방군 장교와 사병의 마음속 스타라는 평가를 받는 펑리위안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한 것도 그에겐 든든한 '빽'이 됐다.

중국에서 자본주의가 가장 꽃피었다는 저장성 서기 시절 보여준 그의 기업관은 명쾌하다. "먼저 돈을 버는 것과 동시에 국가를 위해 부를 창조하고 사회를 위해 일자리를 제공하며 열심히 자기 기업의 발전과 국가의 운명을 결합하고 개인의 부와 전체 노동자의 공동의 부를 결합해야 한다. "

저자는 하지만 시진핑이 베이징에서 부동산업을 하는 누나와 비리 혐의로 지명수배까지 받은 중국 갑부와 호형호제하는 동생을 두고 있는 게 흠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오광진 기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