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을 '조선 아름다움의 권화(權化)'라고 극찬한 사람은 일본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였다. 전통 건축에서부터 도자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미에 푹 빠져있던 그는 자연과의 조화를 고려해 세워진 광화문에서 이중의 아름다움을 봤다. 멀리 북악은 물론 주변 지형과도 잘 어우러져 '자연은 건축을 지키고 건축은 자연을 장식하는 모양새'라 했다. 단순하고 태연한 건물의 자태는 왕조의 위엄을 나타내는 기념비로 손색이 없다는 평가다.

광화문은 조선 태조 때인 1395년 경복궁 정문(正門)으로 건립됐으나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쳤다. 임진왜란 때 불탄 뒤 273년 동안 방치됐다가 1865년에야 중건됐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다는 구실로 1927년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현 국립민속박물관 자리로 이전해 버렸다. 그마저도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돌로 된 부분만 남고 소실됐다.

1968년 다시 건립할 때는 위치를 원래 자리에서 북으로 14.5m,동으로 10.9m 옮겼고,문루(門樓)도 나무가 아닌 콘크리트를 썼다. 정밀한 고증보다는 속도를 중시하던 개발연대의 특징을 보여준다. 2006년부터 해체 발굴 고증을 거쳐 광화문을 다시 짓고 있는 데는 이런 사연이 있다. 문화재청은 이번이 '진짜 복원'이라고 강조한다. 원래 자리에,문루도 목재를 사용해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해체 복원공사에 착수한 지 3년여 만인 27일 상량식(上樑式)이 열렸다. 1865년 중건할 때 상량에서부터 따지면 꼭 144년 만이다. 상량식은 건축물을 지을 때 기둥을 세우고 보를 얹은 다음 마룻대를 올리는 의식이다. 마룻대는 건물의 중심이어서 재목도 가장 좋은 것을 쓴다. 이를 올릴 때는 지신(地神)과 택신(宅神)에게 제사를 지내고 이웃에 술과 떡을 대접한다. 새 건물에 재난이 없도록 하늘에 도움을 청하는 절차인 셈이다.

광화문은 지난 600여년 동안 파란의 역사를 함께한 건축물이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적을 처단한 후 군사를 이끌고 들어온 곳도,중종 반정을 주도한 박원종이 반군을 몰고 들이닥친 곳도 광화문이었다. 조광조가 사약을 받자 전국의 유생들이 이곳으로 몰려와 무고를 호소하기도 했다. 상량식에는 이런 변고 없이 평온만 있기를 비는 뜻도 담겨 있을 게다. 탈없이 완공(내년 10월 예정)된 다음 긴 세월 나라의 안녕을 지켜보는 상징으로 남기를 바랄 뿐이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