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커도,너무 작아도 안된다. "

유럽연합(EU)의 정치통합을 강화할 '미니 헌법' 리스본조약이 12월1일자로 발효됨에 따라 이제 거대 EU의 얼굴이 될 'EU 대통령'의 영예를 누가 차지하게 될지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U에서 내로라하는 전 · 현직 정치인들이 EU 대통령 자리에 입질을 하는 가운데 회원국들은 각자 이해관계에 따라 '적당한' 파워와 지명도를 갖춘 인물을 찾아 저울질하고 있다. 초대 EU 대통령은 오는 19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릴 EU 특별정상회담에서 추천된 후보들을 대상으로 다수결 방식으로 선출될 예정이며 내년 1월부터 정식 활동에 들어간다.

원래 EU 대통령의 정식 명칭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President of European Council)'이다. EU 외무장관 직책과 더불어 리스본조약을 통해 신설되는 이 자리는 EU의 정체성과 정치적 결집력을 키우기 위해 만들어졌다. 현재의 6개월 임기 순환의장제로는 언어도,이념도,경제 수준도 너무나 다른 27개 회원국을 이끌고 국제 무대에서 미국과 중국에 맞서 유럽의 하나된 목소리를 낸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EU 대통령은 향후 개인의 역량과 정치 판도의 변화에 따라 상징적인 '얼굴마담' 이상의 실질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EU 대통령 임기는 2년6개월로 1회에 한해 연임이 가능하다. EU 대통령의 정확한 권한과 의무는 리스본조약 안에 자세히 명시돼 있진 않지만,EU 정상회담을 주최하고 EU를 대표하는 리더로서 외교 무대에서 활약하는 것이 주요 임무라는 건 회원국 모두 인정하고 있다. EU 대통령이라 해서 정식 관저가 제공되는 것은 아니며 EU본부가 있는 브뤼셀에 집을 얻을 경우 관련 주거 비용을 지급할 뿐이다. 연봉은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았지만 현 EU 집행위원장인 주제 마누엘 바로수의 연봉 29만5000유로(약 5억1000만원)와 비슷한 수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 독일 슈피겔 등 유럽 주요 언론들에 따르면 EU 대통령의 후보자들로는 유럽 내 중간급 규모 나라들로 EU 결성의 주역이었던 베네룩스 3국(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의 총리들이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EU에서 가장 힘센 강대국으로 통하는 독일과 프랑스는 자국의 이해관계에만 충실할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처음부터 후보군에서 제외됐다.

당초 EU 대통령의 적임자로 예상됐던 토니 블레어 영국 전 총리는 친미 성향이 너무 강하다는 게 최대 약점으로 꼽히며 선출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고 있는 상태다. 블레어 전 총리는 재임 당시 다른 유럽국가들과 달리 미국의 이라크전을 찬성하고 현지에 영국군을 파병하면서 유럽 국가들로부터 '부시의 푸들'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또 영국이 유로화를 사용하지 않고,EU 국가간 통행 제약을 없앤 셍겐조약에도 가입하지 않았다는 점도 블레어를 EU 대통령 자리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블레어를 밀어내고 EU 대통령 당선이 가장 유력시되는 인물은 헤르만 반 롬푸이 벨기에 총리다. 올 1월 총리로 취임한 롬푸이는 중도우파 정당인 기독민주당(CD&V) 소속으로,국제적인 거물급 인사인 블레어에 비해 거의 무명에 가까울 정도였다. 하지만 공용어가 세 개(프랑스어 독일어 네덜란드어)나 되는 데다 지역 간 첨예한 갈등으로 바람 잘 날 없는 벨기에 정계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EU 통합을 부드럽게 진행시킬 만한 자질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53세의 비교적 젊은 정치인인 얀 페터르 발케넨더 네덜란드 총리와 14년째 룩셈부르크 총리직을 지키고 있는 장 클로드 융커도 유럽 국가들이 선호하는 중도우파 인사로서 EU 대통령 물망에 오르고 있다. 발케넨더는 2002년 4월 마흔여섯의 젊은 나이로 총리직에 올라 화제가 됐었지만 당시 네덜란드 연정이 붕괴되면서 취임 86일 만에 물러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전력'이 있다. 하지만 2003년 총리직 재도전에 성공하면서 현재까지 네덜란드 국정을 운영하며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융커는 EU 최장수 총리로서의 관록을 자랑하며 원만한 성격과 정치력을 과시하고 있다. 특히 유로존(유로화 사용 16개국) 재무장관 회의를 주재하며 글로벌 시장에서의 영향력이 크다는 점도 강점으로 꼽힌다. 이 밖에 파보 리포넨 핀란드 전 총리와 현 EU 순번의장국인 스웨덴의 프레드릭 라인펠트 총리,바이라 비케-프라이베르가 라트비아 전 대통령, 메리 로빈슨 아일랜드 전 대통령 등도 후보군에 이름이 올라 있다.

EU 대통령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후보들의 윤곽도 드러나면서 EU 내에서 지금까지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해 온 EU 산하 주요 기구의 수장들은 벌써부터 경계감을 나타내고 있다. 바로수 EU 집행위원장은 리스본 조약의 발효로 신설될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을 'EU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EU 뉴스 전문 인터넷매체 EU옵서버는 바로수 위원장이 지난 7일 유럽의회에 출석해 "일각에선 리스본 조약이 발효되면 '유럽 대통령'(President of Europe)이 생길 것이라고들 얘기하는데 미안하지만 틀렸다"며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말했다.

바로수 위원장의 이 같은 발언은 유럽 거물 정치인들이 초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의 유력 후보로 떠오르면서 자신의 입지가 위축될 것을 우려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