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로만 머물고 싶지 않았어요. 더 넓은 세상에 나가보려고 하루에 8시간 일하고 8시간씩 공부했죠."(유순옥 인터컬추럴 커뮤니케이션&인포메이션 대표)

1970년대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 중 일부가 현지에서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사업가'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그 주인공은 유순옥 대표(54), 이상숙 커뮤니케이션코리아 대표(57), 김상득 슈펭글러컨설팅 공동대표(55).유씨와 이씨는 각각 브레멘과 베를린에서 한국으로 진출하려는 독일기업과 독일로 오는 한국기업에 대한 컨설팅을 해주는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김씨는 남편 슈펭글러와 함께 함부르크에서 독일 현지 기업의 재무 · 조직 관리를 돕는 '슈펭글러 컨설팅'을 꾸리고 있다.

이들은 각각 1972~74년 한국을 떠났다. 외화 벌이를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3년 독일 정부와 광부 · 간호사 송출 계약을 맺은 데 따른 것이다. 근무계약서는 3년간 일한 뒤 귀국하도록 규정했지만 현지에서 헌신적인 한국인 '나이팅게일'에 대한 호평이 많아 연장 근무를 제안하는 병원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의 꿈은 보다 높았다.

유씨는 "독일에 올 때부터 유학에 대한 꿈이 있었다"고 했다. 간호사는 하나의 수단이었을 뿐 '엘리트 여성'으로서 꿈을 펼치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실제 당시 한국에서 정식 간호사가 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강릉간호학교 선 · 후배 사이인 이씨(5기)와 유씨(8기)는 "당시 간호학교 입학 경쟁률이 20 대 1에 달해 합격하면 출신 중학교에 현수막이 내걸렸을 정도"라고 떠올렸다.

말도 설고 문화도 달라 적응하기 벅찼지만 이들은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독하게' 살았다. 유씨는 "독일 간호사 생활 4년차에 접어들 무렵 야간 고교(아벤트 김나지움)에 등록해 매일 악바리처럼 공부했다"며 "결국 1981년 장학금을 받고 브레멘대 심리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비슷한 무렵 이씨는 베를린자유대 경영학과(부전공 법학)에, 김씨는 뮌헨통역학교에 들어가 학업을 이어갔다. 독일에 올 때는 인사말이나 겨우 할 수 있던 독일어는 금세 유창한 수준에 올라섰다.

이들의 사업 규모는 아직 크지 않은 수준이다. "독일은 세금을 많이 내야 하고 각종 규제도 많아 사업 하기가 쉽지는 않다"고 이씨는 설명했다. 그래도 전인미답의 길을 당당히 걸어왔다는 자신감은 컸다.

이씨는 "파독 광부 · 간호사들은 조국의 경제 발전과 민주화에 직 · 간접적으로 도움이 됐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했다. 김씨는 "1960~70년대 우리를 독일에 보냈던 한국과 지금 발전한 한국을 비교하면 늘 자랑스럽다"며 "앞으로도 더욱 돈독한 한 · 독 교류가 이어졌으면 한다"고 밝혔다.

쾰른 · 베를린(독일)=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