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술과 예술이 만나면 미술판이 벌어진다?

X레이 아티스트,화가,사진 작가,조각가,민화가,갤러리스트로 활동 영역을 넓히는 의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의사의 시선에서 세상과 그곳에 깊이 난 상처를 조명한다. 가히 '의료 아티즘'이라 부를 만하다.

'X레이 아트'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정태섭 영동세브란스병원 영상의학과 교수(54)는 전문 사진 작가로 활동하며 예술 감각을 뽐낸다. 예술과 과학의 새로운 융합을 시도하는 그는 사진의 기존 장르를 변혁하기 위해 사진기를 이용하지 않고 X레이 영상으로 새로운 형식의 사진 작업을 하고 있다. 다양한 꽃이나 풍경을 의료용 X레이 장비로 촬영,물체 내면의 구조와 역동성을 리얼하게 포착해낸다. 그의 작품 '꽃의 빅뱅'은 미래앤컬처(옛 대한교과서)가 내년 발행할 중학교 미술교과서에 실릴 예정이다. 정 교수는 다음 달 7~13일에 서울 인사아트센터에서 '사진기 없는 사진'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전을 열어 그동한 작업한 작품 20여점을 보여줄 예정이다.

또 전국의 전문의 18명도 다음 달 서울 영등포구 안국약품빌딩 1층 AG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개최한다. 내달 6일부터 연말까지 2부에 걸쳐 진행될 기획 전시 '처방전'에는 이들이 틈틈이 작업한 사진,만화,그림,목공예,단편영화 등 다양한 작품으로 꾸며진다. 이번 전시회 출품작 가운데는 사진 작품이 가장 많다. 야생화 사진,수술실 현장 사진,조류 사진 등 다양한 종류의 사진이 전업 작가가 포착하지 못한 세상을 보여준다.

노상익 서울보훈병원 의사(44)는 수술실 현장에 초점을 맞춘 사진을 찍고 있다. 환자의 장기 조직을 떼어 현미경으로 보기 위해 만든 수백개의 슬라이드들,그의 손을 수천 번 거쳤을 수술 도구,숨막히는 순간들로 꽉찬 수술실 등 모두 병원을 소재로 하고 있다.


김준철 경기도 성남 미래연합의원 원장(43)은 사진동우회 활동을 하면서 사진 작가로 변신한 케이스.주말이면 한강을 비롯해 탄천,천마산,강릉,설악산 등을 다니며 희귀 새와 야생화를 찍어왔다. 이번 전시회에는 설악산 대청봉에서 찍은 '작 까마귀',강릉 경포대에서 찍은 '붉은 어깨 도요새''바람 꽃'등 4점을 출품한다.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을 하는 김태언 청주 공군항공우주의료원 외과과장,박상윤 안과의사 등 사진 작가를 꿈꾸는 의사들은 적지 않다.

그림도 빼놓을 수 없다. 장혜숙 인천 장앤탑 내과의원 의사는 1989년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미술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2005년에 화랑을 개업해 이미 인천지역 미술계에선 꽤 알려졌다. 그는 "지금도 갤러리보다는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더 좋다"며 "이번 전시회에 추상화 4점을 건다"고 말했다.

한미애 서울 양천 한소아과 의사는 민화의 매력에 푹 빠져있다. "전문의를 딸때 일만 하면서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그가 본격적으로 민화를 다루게 된 동기다. 연꽃을 소재로 한 민화 작업을 3년간 진행해온 그는 이번 전시회에 근작 3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조각,설치,미디어 영상 작품을 출품한 의사들도 있다. 한기환 대구 계명대병원 성형학과 교수는 언챙이 환자의 얼굴을 브론즈 조각으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역량을 과시하고,김영백 중앙대병원신경 외과교수는 독특한 진료실 현장을 전시장에 그대로 옮겨오는 설치 작업을 선보일 예정이다. 또 주연상 울산 주연성형외과 의사는 병원비가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한 한 소년의 기사를 접하고 찍은 단편영화를,김승범 홍대제네럴닥터의원 의사는 진료실을 전시장에 옮겨놓는 설치작을 각각 선보일 예정이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