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셋이 모이면 고스톱을 치고 넷이 만나면 골프를 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둘이 만나면 뭘 할까. 회의(會議)를 한다. 직장인에게 그만큼 회의가 많다는 얘기다. 오죽했으면 직장인은 '호모 컨퍼런스쿠스(회의적 인간)'란 말이 나왔을까.

회의는 직장인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회의가 없으면 직장이 굴러가지 않는다. 직장인도 없다. 직장인 일과 중 30%는 회의라는 통계도 있지만,회의 없는 직장생활은 상상할 수도 없다.

문제는 김 과장,이 대리에게 '나쁜 회의'가 여전히 많다는 점이다. 시도 때도 없이 소집되는 회의,처음부터 끝까지 야단만 맞는 회의,결론도 없이 시간만 질질 끄는 회의가 아직도 부지기수다. 물론 유쾌한 회의,소통하는 회의,맛있는 회의 등 '착한 회의'가 많이 늘고는 있다. 그렇지만 '먼나라 이웃나라' 얘기인 경우가 아직은 더 많다. 김 과장,이 대리의 상사들이 회의(會議)를 주재할 때 김 과장,이 대리는 어김없이 회의(懷疑)에 빠져드는 게 현실이다.
[金과장 & 李대리] 30분만에 또? … 김부장이 會議할때 우린 왜 懷疑가 들까
이런 회의… 정말 회의적이야!

대기업 마케팅팀에 근무하는 김모 대리(29)는 회의 중독증에 걸린 팀장 때문에 미칠 지경이다. 6개월 전 부임한 팀장은 회의 만능주의자다. 매일 팀원들이 출근하자마자 어김없이 회의를 소집한다. 팀원들 업무 계획 등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보고를 받기 위해서다. 이건 견딜 만하다. 아이디어 회의라도 예정돼 있으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팀장의 성에 차는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으면 자정이 넘어도 회의를 끝내지 않는다. 김 대리는 "회의에 치여 경쟁사로 이직하는 걸 심각히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증권회사 5년차인 이모 대리(32)는 일요일 오후만 되면 숨이 막혀 온다. 매주 월요일 오전에 열리는 부 회의 탓이다. 주간 일정을 점검하자고 만든 월요회의는 부장의 일방적 훈시 시간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부장은 전 주에 영업 실적이 부진한 직원들을 깨면서 회의를 시작한다. "왜 당신은 그것밖에 안되냐"는 질타성 발언과 "내가 대리일 땐 안 그랬다"는 자기도취형 무용담이 이어진다.

그 다음엔 다짜고짜 영업 아이디어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른다. 그것도 한사람씩 순서대로 말해보라고 한다. "마치 한사람씩 단두대에 올라가는 느낌"이라는 게 이 대리의 하소연이다. "기탄없이,자유롭게 말해보라"는 부장의 '낚시'에 겨우 용기를 내 몇 마디하다가도 "그게 말이 되냐"는 핀잔을 들으면 입끝에 걸렸던 말도 삼키고 만다.

회의야? 고문이야?

대기업 기획팀에서 근무하는 하모 과장(38)은 하루 근무시간의 절반가량을 회의로 보낸다. 최근 새로 부임한 팀장이 워낙 '다변'이기 때문이다. 매주 월요일 오전 회의는 기본이 2시간이다. 회의가 시작되면 주제는 어느새 역사 철학 영화 문학 등을 넘나든다. 말 그대로 '고품격 인문학 강좌'다. 때문에 하 과장을 포함한 팀원들은 최근 몇 가지 수칙을 세웠다. '회의 중에 절대로 팀장에게 질문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말 것,팀장의 얘기에 절대 관심을 보이는 표정을 짓지 말 것' 등이다. 하 과장은 "팀원들은 가급적 근무시간에 팀장과 눈을 맞추지 않으려고 한다"며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사람들을 불러모아 회의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깨고 또 깨고…지겹다 지겨워

부장의 원맨쇼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다. 부장의 훈시가 끝나면 차장과 과장의 '쇼'가 이어진다. 본인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탓인지,부하 직원들을 일일이 깨고 자리를 뜬다. 이른바 '줄빳따'가 한참이나 이어져야 회의가 끝나는 조직도 상당하다.

회의만 괴로운 게 아니다. 회의 때 착 가라앉은 분위기를 푼답시고 소집되는 회식자리도 마찬가지다. "절대 공장 얘기는 하지 말자"고 다짐해 놓고서는 술잔이 몇 순배 돌면 공장 얘기가 어김없이 이어진다. 혀가 꼬인 팀장이 갑자기 "당신 회의 때 아이디어가 그게 뭐냐"며 "그 따위로 살지 말라"고 포문을 연다. 그 다음은 십자포화다. 1차,2차,3차에서 십자포화를 맞고 나면 거의 그로기 상태다.

보험회사 영업사원인 김종수 과장은 "회의도 모자라 회식자리까지 이어지며 훈계를 받다보면 이게 뭐하는 짓이냐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다보니 "회의 때 빠지기 위해 친인척 생일과 제사는 물론이고 가끔은 친구와 은사들까지 희생(?)시키곤 한다"고 귀띔했다.

대안 없는 동료 '회의의 적'

상사들만 고문관 노릇을 하는 게 아니다. 동료나 선후배 중에도 적인지 아군인지 정체가 불분명한 이들이 적지 않다. 직장표 '투덜이'들도 그 중 하나다. 이들은 회의 때 결코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누가 말만 하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진다. "그건 당신이 몰라서 하는 얘기고…,다른 회사 있을 때 해 봤는데,죽어도 안됐거든." 이런 식이다. 그렇다고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 어떡하면 좋을까"라고 물으면 "그걸 찾자고 회의하는 것 아니야"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비판하고 김빼는 것만으로 밥값을 했다고 만족해 하는 족속들이다.

어디 그뿐인가. 외국계 광고회사에 다니는 정모 대리(30)는 최근 친한 동료가 술을 한잔 쏜다고 해서 무심코 나갔다가 낭패를 봤다. 술이 한순배 돌자 경쟁사 광고가 화제로 떠올랐다. 정 대리는 한참 동안이나 문제점과 대안 등을 신나게 떠들었다. 그게 문제였다. 정 대리가 쏟아냈던 의견은 일주일 뒤 열린 기획회의 때 동료의 아이디어로 둔갑해 발표됐다.

동료가 술 한잔 사고 정 대리의 아이디어를 슬쩍 했던 것이다. 정 대리는 "아무리 지식재산권이 없다 해도,동료 아이디어를 빼가는 건 견디기 힘들다"며 "회의 때 아무 말도 안하고 있다가 끝날 무렵에 아이디어를 취합해 자기것처럼 번지르르하게 내놓는 일종의 '주워먹기'족도 얄밉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착한 회의'도 는다

물론 회의 방식도 진화한다. 최근엔 회의를 여러 개의 모듈(부분)로 나눠 각 모듈별로 책임을 지게 해 시간을 절약하는 회의가 인기다. 외국계 제약회사에 다니는 김준석 대리(31)는 "팀장이 각자의 바쁜 일정을 고려해 사전에 메일로 회의할 때 발표할 안건을 지정해 주는 것이 아주 생산적"이라고 소개했다.

중장비회사 해외 마케팅팀의 김익수 대리 역시 요즘 달라진 팀 분위기를 실감하고 있다. 부어라 마셔라식 회식이 줄어들긴 했지만,팀원간 친밀도는 오히려 높아졌기 때문이다. 메신저 덕분이다. 김 대리가 속한 마케팅팀의 팀원 6명은 모든 회의를 메신저를 통해 한다. 그는 "어차피 미리 주제를 정해 전달해주는 데다 회의 때문에 이동할 시간을 절약해 인터넷 등을 뒤져 아이디어를 집약할 수 있으니까 좋다"고 말했다. 특히 "직접 만나면 맨송맨송하다는 이유로 한잔하자는 말이 나오는데,메신저 회의 때는 이런 일이 없어 아주 효율적"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관우/이정호/정인설/김동윤/이고운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