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 기관장 평가단에 참여하고 있는 모 대학 교수는 이틀 전 한 공기업 사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 점수가 최하위 등급이라는데 무슨 근거로 그런 평가를 매겼느냐? 소송을 낼 수도 있으니 다시 생각해봐라." 일종의 협박이었다.

평가단 소속 다른 대학 교수는 더욱 어처구니없는 전화에 황당했다. 모 국가권력기관 간부라며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우리 장(長)께서 참고할 게 있다고 하시니 잠정 평가 결과를 알려 달라"는 것이었다. 이 교수는 "추측컨대 친분 있는 공기업 사장에게 부탁을 받고 평가 결과를 미리 캐내려고 전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사상 처음으로 실시되는 공기업 기관장 평가가 결과 공개를 앞두고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평가에 참여하고 있는 관계자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온갖 로비와 협박으로 얼룩져 그야말로 '난장판'으로 치닫고 있다는 후문이다.

정부는 공기업 개혁 차원에서 92개 공기업 기관장에 대한 평가를 진행 중이다. 평가는 대학 교수 등 45명의 민간 전문가로만 구성된 평가단에 맡겨져 있다. 평가단은 기관장에 대한 서면평가와 면접을 모두 마치고 개인별 잠정 점수를 매긴 상태이며 이번 주말 최종 조율해 다음주 초 정부에 넘기고 정부는 19일이나 22일 공공기관운영위원회를 열어 결과를 공개할 예정이다.

이번 공기업 기관장 평가는 사상 처음 실시된다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평가 결과 최하위 등급을 맞아 옷을 벗어야 하는 기관장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초미의 관심사다. 특히 이번 평가는 공기업 개혁을 부르짖는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챙길 만큼 중대 사안이다.

평가단에 속한 A교수는 "온갖 '줄'을 동원해 결과를 미리 캐내 발표 이전에 점수를 바꾸려는 시도가 난무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특히 낙하산 인사로 들어간 기관장들 중 일부는 '정부에 잘 보여야 하는데 결과가 나쁘게 나오면 안 된다'며 아예 대놓고 점수를 다시 산정해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 한 공기업은 평가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며 공식 발표 전 결과를 뒤집기 위해 사활을 걸고 로비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대학 B교수는 "온갖 로비전화가 폭주해 휴대폰을 꺼놓고 지낸다"며 "이런 곤혹스런 평가 작업을 왜 맡았는지 후회가 된다"고 했다. 그는 "평가단에 참여한 교수와 연구원들은 대부분 공기업 개혁이라는 사명감을 갖고 양심껏 평가에 참여하고 있다"며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면 다음부터 누가 평가단에 들어가려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B교수는 "평가 결과가 공개되면 최하위 등급을 맞은 일부 기관장들이 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며 줄 소송을 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후폭풍을 우려했다.

평가 방식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C교수는 "이번 평가는 쉽게 말해 공기업 사장을 맡은 후 직원을 몇 명 줄였고,인턴은 몇 명 채용했는지와 같은 것들이 점수 차이를 가르게 돼 있다"며 "이런 식의 평가는 단적으로 정부 시책을 얼마나 잘 따랐느냐를 따지는 것밖에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제대로 평가하려면 기관장이 경영자로서 전략적 사고를 갖고 있는지,리더십을 갖추고 있는지 등 경영 역량을 평가해야 한다"며 "그래야 능력도 없으면서 낙하산으로 내려온 무능한 기관장을 골라낼 수 있다"고 꼬집었다.

공기업 기관장들도 나름대로 불만이 많다. 한 공기업 사장은 "인턴 채용과 명퇴 신청 등 계량적 지표 평가에서 정부 가이드라인을 훨씬 초과하는 실적을 냈음에도 미흡하다는 평가가 나왔다니 이해할 수 없다"며 "평가 과정에 정부의 입김이 들어간 것 아니냐"는 반응이다. 평가단 관계자도 "당초 의욕적으로 경영목표를 내놨다가 달성하지 못한 기관장과 소극적인 목표를 제시해 달성한 기관장을 같은 잣대로 평가할 경우 억울한 케이스가 나올 소지도 있다"고 지적했다.

정종태 기자 jtch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