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여자라고 하지만 용서 못해~.'

드라마 '아내의 유혹'이 시청률 40%를 넘나들며 큰 인기를 끌고 있을 때 작가 김순옥씨(38)의 휴대폰에서는 이런 컬러링이 흘러나왔다. 드라마 주제가인 '용서 못해'의 후렴구였다. 하지만 드라마가 끝나고 한 달 뒤 전화를 걸었더니 평범한 벨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하나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때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 빠져들어야 하는 방송작가로서 이제는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단계에 있었던 까닭이다.

지난 4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서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고 있는 김씨를 만났다. 그는 "한 작품을 끝내고 거기서 완전히 빠져 나오지 않으면 다음 작품에서 비슷한 인물들과 비슷한 얘기가 나올 수 있어 '아내의 유혹'에 대한 모든 것을 지워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아내의 유혹'에 워낙 독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는데,실제 생활은 어떤가요.


"저를 아는 사람들이 드라마를 보고 많이 놀라요. 실생활과 전혀 다른 캐릭터와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어내냐고요. 제가 '아내의 유혹'에 나오는 사람들 만큼 괴팍하지는 않아요.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애들을 키우고 있는 주부예요. 범죄하고는 정말 거리가 멀죠.준법정신도 얼마나 투철하다고요. 신호위반 한번 걸려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생활 속에서 일탈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상상 속에서는 흉악한 범죄를 그리는 경우도 있거든요. 억눌린 욕구 같은 것이 있으니까요. "

▶시청률로는 성공했지만 '막장 드라마' 논란도 일으켰는데요.

"'아내의 유혹'이 이른바 '막장' 논란의 중심에 있기는 했죠.하지만 순기능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병원에 계신 환자분들이 얘기를 많이 해줬어요. 정말 아프고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아내의 유혹'이 방송되는 40여분간은 고통을 잊는다고요. 그것도 드라마가 할 수 있는 큰 역할 중 하나라고 봅니다. 글 모르는 할아버지,시계도 못 보는 할머니들이 '아내의 유혹' 방송시간만 기다렸다고 해요. 거창하게 '40분 동안 대한민국에 엄청난 교훈을 줄거야'라기보다 그 시간만큼 아픔과 외로움을 잠시 잊게 해주는 드라마도 필요한 거죠."

▶40%를 넘는 시청률의 비결은 뭔가요.

"저는 비밀 하나 가지고 질질 끄는 드라마는 싫어해요. 그래서 빠른 전개와 긴박하게 몰아가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어요. '아내의 유혹'이 방송되는 오후 7시20분대는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많이 보는 시간인데 시청률을 높이려면 빠져들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강한 인물들을 만들었죠.주부들이 보기에는 자신들이 못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구은재가 해주니까 대리만족을 느끼는 측면이 있었나봐요. 인물들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도 있었지만 지금 시대에는 강한 인물들,순종적이지 않고 능동적인 인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발연기'(연기를 발로 하는 듯 연기력이 부족한 것) 하는 배우들이 없었던 것도 비결의 하나였고요. "

▶가족들은 '아내의 유혹'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남편은 드라마를 잘 보지 않아서 인터넷에 떠도는 나쁜 얘기를 듣고 속상해 하더라고요. 애들은 정말 좋아했어요. 선악 대비가 극명했기 때문에 초등학생들 코드에도 맞았죠.드라마 방송 시간이면 애들이랑 같이 보면서 '저 사람들처럼 살면 안 된다'고 얘기해줘요. 요즘 애들은 똑똑해서 나쁜 것 보고 나쁘다 하고,좋은 것 보고 좋다고 얘기하면 이해해요. 세상에서 어떻게 푸른 초원만 바라보고 살겠어요. 음침한 골짜기도 봐야죠.일종의 예방주사라고 생각해요. "

▶드라마 소재는 어디서 찾나요.

"작가에겐 사람들을 만나는 게 재산입니다. 주변을 천천히 살펴보면 독특한 사람들이 많아요. 그리고 제가 아는 사람들의 친구 얘기를 들으면서 신기한 사람들을 접하죠.저는 정말 수다 떠는 걸 좋아해요. 휴대폰에 번호를 저장한 700여명과 만나거나 통화를 하는 중에 드라마 속 캐릭터가 태어나요. 책도 많이 봐야 하지만 실제 사람을 통해서 얻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친구들 모임,동네 아줌마 모임,학부모 모임 등 불러주는 곳이면 다 나갑니다. 제가 만들어낸 독특한 대사들도 다 수다 안에 있어요. 덕분에 휴대폰 통화료만 한 달에 수십만원이 나가죠."

▶드라마 작가는 시청률이라는 족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같은데요.

"2000년 MBC '베스트극장'으로 방송된 데뷔작 '사랑에 대한 예의'는 16% 정도의 시청률이 나왔어요. 입양한 애가 병이 있는 것을 알고 돌려보내는 가슴 아픈 얘기였는데 당시 '베스트극장'의 평균 시청률이 20%나 될 만큼 잘 나가던 때라 평균도 못했다는 얘기를 들었죠.두 번째 작품을 방송할 때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날이었어요. 9%의 시청률이 나왔는데 베스트극장 연중 최저 시청률을 기록했죠.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시청률이 그렇게 안 좋으니까 작품도 욕 먹고 그랬어요. "

▶왜 드라마 작가를 하게 됐나요.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좋아했어요. 하도 드라마를 많이 본다고 아버지께서 TV 전원 콘센트에 테이프를 붙여 놨을 정도였죠.글을 읽을 수 있게 된 뒤로는 300원만 있으면 헌책방에 가서 세계명작동화를 사서 읽었어요. 드라마가 밤 12시에 끝나면 소설을 읽는 식이었죠.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하이틴 로맨스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그게 우리 반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어요. 대학(이화여대 국문과 89학번)에 가서는 소설가를 꿈꿨는데 4학년 때부터는 신춘문예에도 매년 응모했죠.하지만 최종 심사까지는 가는데 끝에서 꼭 떨어지더라고요. 이 길이 아닌가 보다 싶어서 어느 정도 체념하고 결혼해서 애를 낳았죠.큰 애가 두 살 때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베스트극장' 신인작가 공모 안내를 보고 뭐라도 한번 해보자는 생각에 두 주에 걸쳐 신나게 썼어요. 드라마 대본을 한번도 써보지 않은 상태라 작법에 맞지 않는 글이었지만 35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당선됐어요. "

▶드라마 작가의 하루는 어떤가요.

"드라마를 쓸 때는 일반 직장인처럼 아침에 일어나서 집중적으로 글을 써요. 하루종일 컴퓨터를 켜놓고 씨름하기보다 스트레스를 풀고 맑은 정신으로 일해야 글이 나오거든요. 오전 6시30분 정도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애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돌아와서 커피 한잔 마시고 일을 시작합니다. 애들은 오후 3시 넘어 돌아오니까 6시간 동안 집중해서 써요. 그리고 애들이 돌아오면 다시 밥 챙겨 먹여서 학원에 보내고 밤 12시 정도까지 글을 쓰죠."

▶어떤 점이 힘듭니까.

"글이 안 써질 때 제일 힘들죠.일일극을 하면 일주일에 A4용지 100장 정도를 씁니다. 매일 25장씩 5일 동안 쓰니 상당한 분량이죠.어떤 때는 24시간 앉아 있어도 한 글자도 못 쓸 때도 있어요. 그럴 때는 밖에 나가 수다를 떨거나 잠을 자요. 그러다 보면 갑자기 실마리가 풀릴 때가 있어요. 설거지 하다가도 '아,빨리 가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나죠.작가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그분이 오셨을 때'라고 부르는 그 순간 기분이 정말 좋죠.3시간 만에 한 편을 쓰기도 해요. 드라마 시작하기 전에 30~40회 분량을 미리 써놓고 시작해서 대본을 늦게 줘본 적은 없어요. "

▶프로작가가 되기 위한 비법이 있나요.

"저는 글 쓰고 이야기 만드는 것을 워낙 좋아해요. 편지,일기 등등 가리지 않고 쓰죠.친구와 편지를 노트 한 장 분량으로 주고 받은 적도 있어요. 혼자 누워 있을 때도 세상에서 일어난 일을 뉴스로 보고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곤 해요. 제 나름대로 재구성을 해보는 겁니다. '누가 누구를 죽였다는데 원래 진범은 따로 있고…' 하는 식으로 재편집을 하는 습관이 있어요. 음모론을 좋아하는 거죠."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요.

"쓰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요. 가족 드라마를 기본으로 해서 어릴 때 봤던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와 같은 철학적인 질문에 답하면서 재미가 있는 그런 드라마를 써보고 싶어요. "

글=박민제/사진= 허문찬 기자 pmj5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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