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택 <경희대 교수ㆍ의료경영학>

지난달 발표된 서비스산업 선진화 방안 중 의료분야의 내용을 보면,코헨 미시간대 교수가 창안한 쓰레기통모형이론(Garbage Can Theory Model)이 우리 정부의 의료정책 결정과정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쓰레기통모형이론은 조직의 구성원 사이에 응집성이 낮고 이견이 높을 경우 불합리한 의사결정이 일어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한 이론이다. 즉 쓰레기통에 마구 던져버린 쓰레기들이 뒤죽박죽 엉켜서 이상한 모양으로 변화하듯이 불합리한 의사결정이 이뤄질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는 최선은커녕 차선의 정책도 제시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료선진화 방안이 꼭 그 꼴이다. 정부는 지난 1월 서비스산업 선진화 방안에서 공언했던 의료분야의 핵심규제완화 사안(투자개방형 의료법인 허용,일반의약품의 슈퍼판매)을 5월까지 결정하기로 했던 약속을 다시 10~11월로 연기했다. 이같이 정책결정이 연기되고 있는 이유는 정부가 부처간 이견 속에서 눈치보기식으로 결정을 미루는 등 정책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한 데 있다. 아무리 나쁜 의사결정도 의사결정을 연기하고 미루는 것보다 낫다는 게 경영상식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용역과 공청회가 아니라 부처 간 이견을 좁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의료산업을 육성하고자 한다면 결론 없는 검토만 계속하고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는 대신 정부가 신속하게 정책결정을 진행하고 실천방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지난 4월 외국 출장을 통해 글로벌 기업과 외국의 의료전문가들이 한국 의료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를 조사했다. 처음에는 상당수 글로벌 기업들이 한국 의료브랜드에 대해 잘 모르거나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있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한국 의료에 관한 객관적 자료를 가지고 설명을 하고 나니 아시아에서 일본과 중국 사이에 낀 넛크래커 상황이 오히려 한국 의료산업의 글로벌화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즉 일본에 비해서는 역동성과 시설투자 면에서 우위를,중국에 비해서는 투명성과 소프트파워 면에서 우위가 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 관심을 갖고 있는 외국의 의료분야 전문가 및 투자자들조차 우리나라 의료분야에 대해 가장 답답해 하는 게 바로 'NATO(No Action Talking Only)' 말만 많고 실천을 하지 않는 것이다. 영리법인과 일반의약품(OTC) 슈퍼판매 허용은 7년이나 끌어온 해묵은 과제다. 규제완화뿐만 아니라 실천이 시급한 과제들도 산재해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의료에 대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홍보시스템,의료사고처리 인프라,비자문제 및 의료분야 인력들의 영어 및 외국어 의사소통 능력 향상에 대한 준비를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이런 논의가 전략적 차원보다는 실무적 차원에서만 진행되고 있는 점은 싱가포르가 2001년 국가정책 차원에서 의료산업을 육성했을 때 세세한 부분까지 챙겼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산업발전을 위한 3대 생산요소는 토지 노동 자본임을 모르는 의료전문가는 없을 것인데,자본에 의료분야를 개방하면 안된다는 주장(의료비 폭등,국민건강권 상실,건강보험체계 붕괴 등)에 대한 논쟁은 과다했던 반면,의료인력을 글로벌 수준으로 육성하기 위한 논의는 일천했다. 이제 제기된 다양한 제안을 수렴해 그 문제점을 어떻게 보완하면서 의료산업에서 국부를 창출할 것인가에 관해 고민해야 한다.

2004년 경제특구법 개정안 관련 논쟁에서 확인했듯이,의료시장을 개방하면 의료시스템이 붕괴된다는 주장은 사실을 왜곡하고 국민들의 공포심을 조장한 괴담이었다. 더 이상 괴담 논쟁이 아닌 국가 발전을 위한 논쟁에 시간과 열정을 쏟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