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주제 사라마구의 대표적인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 보면 어느날 갑자기 눈이 먼 사람과 접촉한 모든 사람들이 전염되어 실명한다. 그래서 도시는 마비되고 인간은 서로에게 적이 되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 살인,강간,폭력,약탈 등이 전염병처럼 창궐한다. 원인을 모르니 예방이나 치료도 불가능하다.

더욱 문제인 것은 과연 이런 디스토피아적 상황이 특별하고도 비정상적인 일인가라는 점이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았던 여주인공은 갑작스럽게 다시 눈이 보이게 된 사람들을 보며 다음처럼 말한다.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2000년대를 대표하는 젊은 작가 편혜영의 평판작 '아오이가든'을 보면 또 다른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다. 작가가 실제로 2003년 4월 홍콩의 아파트 아오이가든 주민들이 사스 때문에 열흘간 피난 생활을 한 실제 사건을 보고 영감을 얻어 썼다는 이 소설에서는 개구리가 비처럼 하늘에서 떨어지고,집을 나간 뒤 임신한 채 돌아온 누이는 개구리를 낳는다. 주인공은 소설 결말에서 개구리가 되어 아파트에서 비처럼 낙하한다.

이런 아오이가든에서의 삶은 다음처럼 묘사된다. "당국은 치사율이 그리 높지 않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감염률은 높고 치료제가 없기 때문에 공포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병에 걸리면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병을 옮기는 것밖에는 할 게 없었다. 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나을 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공기 중에 떠도는 역병의 기운과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맞서느라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살고 있었다. "

현재 전 세계적으로 신종 플루 환자가 1만명을 넘어섰고,사망자도 100명에 육박하고 있다. 치사율이 높지는 않지만 멕시코,유럽,미국을 넘어 이제는 중국,일본까지 그 범위가 확산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감염률이 주춤하고 있어 다행이지만,신종 플루가 무서운 속도로 번져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감염된 환자와 접촉해 생기는 2차 감염 때문에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이런 비상사태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는 이미 한국에서의 첫 감염자인 수녀님의 침착하고도 이성적인 태도에서 시사 받는 바가 크다. 종말론적인 징후라며 호들갑을 떨 필요도 없고,신종 플루가 매년 찾아오는 다른 인플루엔자들보다 더 위험한 것은 아니라며 지나치게 낙관적인 태도를 보일 필요도 없다. 과장해서 말하면 사실 지구는 언제나 바이러스에 노출된 상태이고,이미 전염병에 걸려 있는 처지라고 할 수 있다.

비근한 예로 불법비디오나 음란비디오를 경계하는 문구가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섭다'는 것이었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막장드라마'에서 처제와 사랑에 빠지는 형부,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갖다 버리는 며느리,영아살해나 어린이 납치를 아무 죄의식 없이 일삼는 어른들은 그 자체로 인간 바이러스에 해당한다. 또한 '리얼 다큐'를 내세우면서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성적 일탈과 흉악 범죄를 흥미 위주로 포장하는 짝퉁 다큐들이 판을 친다.

결국 모든 유형 혹은 무형의 질병을 낳는 근원에 인간이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자학일까. '눈먼 자들의 도시'에는 타인이 지옥인 세상에서 "우리가 완전히 인간답게 살 수 없다면,적어도 완전히 동물처럼 살지는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합시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인간뿐이라면 오히려 인간만이 희망이다. 때문에 인간이 개구리가 되거나 모든 도시가 아오이가든처럼 되지 않도록 만드는 최상의 처방전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자는 것이다. 태초에 '인간'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