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멜로 영화는 더 나이 먹은 뒤에"
엄마 혜자(김혜자)가 길에서 소변을 보는 아들 도준(원빈)에게 약을 먹인다.

혜자(김혜자)는 약을 먹다 말고 달려가는 도준에게 "빨리 와, 늦지 마"라고 말한다.

'빨리 와'는 말썽꾸러기 아들에게 꽥 소리를 치는 느낌이고, '늦지 마'는 혼잣말처럼 새침하면서도 낮게 웅얼거린다.

"앞에 것은 아들한테 하는 말이고, 뒤에 것은 애인이나 남편한테 하듯 여자 느낌으로 해달라"고 한 봉준호 감독의 주문에 따라 나온 장면이다.

"김혜자 선생님도 재미있어하시더라고요. 도준은 혜자에게 남자의 모든 것이라면서요. 아들이자 남동생, 연인, 친구, 남편인 거죠. 닭고기 찢어줄 때도 여자같이 굴잖아요"

21일 오후 칸에서 돌아온 영화 '마더'의 봉준호 감독을 만났다.

배우 김혜자에서 영화가 시작됐고 봉 감독의 끈질긴 구애가 있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김혜자 선생님이 몇십 년 동안 국민 엄마였는데 그것이 영예이기도 하지만 짐스러울 거라고 혼자 추측했어요. '사실은 지겨우실지도 몰라', '이걸 드리면 좋아하실지도 몰라' 하고 멋대로 생각했죠"

봉 감독은 칸 영화제 상영 당시 김혜자의 역할을 "숭고한 엄마와 야수 같은 엄마가 동시에 있는 엄마"라고 소개했다.

"짐승이 새끼를 지키기 위해 상대를 물어뜯고 피를 뚝뚝 흘릴 때처럼 광기에 사로잡히거나 본능이 폭발하는 순간에는 도덕이나 선과 악의 잣대를 들이대기는 힘들잖아요. 엄마의 사랑이 숭고하긴 한데 어느 시점에서 집착과 광기가 되는 거죠. 전 실제 생활에서 목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희생적이고 자상한 엄마 역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힌 김혜자의 어느 모습에서 봉 감독은 그런 광기와 예민함을 발견했을까.

"어렸을 때부터 텔레비전을 많이 보면서 자랐어요. 그땐 텔레비전을 틀면 김혜자 선생님이 나왔거든요. 그 중 '여'라는 드라마가 있는데 시청률은 안 나왔지만 전 굉장히 좋아했어요. 공중파 방송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어릴 때부터 범죄, 추리소설, 이런 어두운 걸 좋아했거든요"

"거기서 김혜자 선생님이 어둡고 히스테리컬한 인물로 나와요. 애를 낳고 싶은데 못 낳아서 훔친 엄마로. 또 토크쇼에 나오신 걸 봤는데 요즘 말로 사차원이신거예요. 왜 드라마에선 저런 모습을 안 보여주실까 했죠"

그는 "단순히 한 배우를 기능적인 연기자로 변신시킨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봉준호 "멜로 영화는 더 나이 먹은 뒤에"
"한국 사회에서 김혜자는 곧 엄마잖아요. 김혜자를 새롭게 표현한다는 것은 곧 엄마라는 주제를 새롭게 다룬다는 거예요. 전 엄마라는 평범한 존재를 살인 사건이라는 극한 상황에 몰아넣고 지켜보는 거죠. '괴물'에서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게 저의 경향인 것 같아요"

영화의 시작은 너른 벌판에서 넋이 나간 혜자가 혼자 춤을 추는 장면이다.

감독은 "미쳤다. 미칠지도 모른다"는 선전포고라고 설명했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계획했던 거예요. 예기치 못한 독특하고 괴이한 느낌으로 시작하고 싶었어요. 인물에 대한 암시를 많이 보여주고 싶었고요"

칸에서 '경쟁부문에서 부당하게 거절당했다'는 극찬을 받고 돌아온 그는 20일 있었던 기자 시사회에서 많이 긴장된다고 말했다.

쉴 틈 없었던 일정에 피곤하기도 할테고, 세간의 이런저런 말에 초연할 듯도 보이는데 집에 가자마자 기사를 검색해 봤다고 한다.

"감독들 다 찾아봐요. 나쁘게 쓰면 막 울고, 좋게 쓰면 신나고. 일찍 올라온 리뷰 몇 개를 봤는데 다행히 평이 좋아서 안심했어요"

"자막을 꼼꼼하게 신경 쓰는 편인데도 어쩔 수 없이 증발되는 것이 있어서 외국 영화제에서는 그런 게 아쉬워요. 귀여운 형사의 독특한 말투에 한국 관객은 킥킥 웃지만 외국인들은 모르잖아요. 한국에서 영화 볼 땐 그런 것 자체가 즐거움이죠. 우리끼리만 공감할 수 있는 뉘앙스가 있으니까"

그의 다음 작품은 '설국열차'. 프랑스 만화를 원작으로 한 '격렬한 SF'다.

박찬욱 감독이 제작자로 참여한다.

봉준호가 멜로 영화를 만든다면 어떨까 싶은 생각에 우디 앨런의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같은 영화는 어떻겠냐고 슬쩍 떠봤다.

"섹시한 것은 좋은데 쿨한 건 안 좋아해요. 쿨 한 건 한 발짝쯤 떨어져야 되는 거잖아요. 전 끝장을 봐야 되는 성격이라. 그리고 아직은 철이 안 들어서 멜로 영화는 좀 더 나이가 든 다음에 해야 될 것 같은데요"

(서울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eoyyi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