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한 청년은 졸업 후 영국 맨체스터 왕립병원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청년이 병원에서 맡은 업무는 바로 수술실에 들어가 수술 과정과 수술대에 오른 환자의 몸을 꼼꼼하게 관찰해 그려내는 '의학 전문 일러스트레이터'였다. 수술실에서 3년을 보내며 진력이 난 그는 '사람의 장기'에서 '행복한 아이들 세상'으로 소재를 틀어버렸다. 그가 바로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 앤서니 브라운(63 · 사진)이다.

2000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그림책 작가에게 주는 '한스 크리스찬 안데르센 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는 우리나라에서도 《돼지책》 《고릴라》 《미술관에 간 윌리》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부모가정,불공평한 가사분담 등 무거운 주제도 선뜻 다룬다.

'2009 동화책 속 세계여행-세계 유명 일러스트레이션 원화전' 전시에 맞춰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브라운은 30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어른들의 고정관념과 달리 어린이는 어려운 것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어린아이에게는 간단하고 쉽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른에게 하듯 아이들과 대화하려고 노력합니다. "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는 자녀와 그림책을 같이 읽을 때의 요령도 귀띔했다.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림을 보면서 아이에게 '지금 그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내지는 '네가 이런 상황이라면 기분이 어떻겠니?'라고 질문을 하면서 대화를 끌어내야죠." 그는 또 "내가 좋아하는 그림책은 글과 그림의 간격을 상상력을 동원해 메워 갈 수 있게끔 유도하는 책"이라고 설명했다.

브라운은 "내 창의성은 단순하고 모호한 스케치에서 시작해 그림을 완성해 나가는 셰이프 게임(shape game)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셰이프 게임이란 첫번째 사람이 어떤 모양을 그리면 다음 사람이 그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려나가는 놀이다. 브라운도 실제로 그림책 작업을 할 때 직관적으로 시작해 서서히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는 방식을 택한다고 한다.

브라운의 작품 구석구석에는 단서가 숨어있다. 일례로 집안일을 엄마에게 모두 미룬 가족이 돼지로 변해간다는 이야기를 다룬 《돼지책》에는 교복의 교표,불쏘시개,시계,조미료통에 돼지 모양이 숨어 있다. 이런 '숨은 그림 찾기'같은 매력도 인기 요인이다. 그림 속에 명화를 패러디해 그려넣는 것도 브라운의 대표 기법 중 하나. 이에 대해 브라운은 "보면 볼수록 새로운 면이 드러나는 복합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서 "사실 의학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할 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인체에서 사람이 튀어나오는 모습을 숨겨서 그린 적도 있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브라운의 작품에는 고릴라와 침팬지가 자주 등장한다. 이들은 유년기의 흔적이다. 고릴라는 브라운의 아버지를,침팬지 윌리는 어린 시절 브라운을 닮아 있다. 브라운은 "무섭고 커 보이지만 섬세하고 여린 면이 있는 내 아버지가 고릴라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면서 "고릴라들의 세계에서 사는 침팬지 윌리를 통해 형과 경쟁하면서도 행복했던 어린시절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브라운의 원화를 감상할 수 있는 전시회는 6월23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린다. 다음 달 4일(오후 2시)과 5일(오전 11시,오후 4시)에는 전시장에서 브라운의 사인회도 예정돼 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