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생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지만 상황은 갈수록 절망적입니다.” 26일 전남 목포시 삽진산단내 C&중공업에서 만난 이 회사 나판열 도크부문상무. 주말이지만 혹시 모를 회사정상화를 준비하기 위해 출근했다는 그는 “회사의 매각협상이 진행중인데도 금융권이 채권회수를 위한 경매절차에 들어가면서 직장과 함께 삶의 의욕도 공중분해되고 있는 느낌”이라며 착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지난해말 조선산업 구조조정때 금융권의 퇴출판정을 받은 C&중공업은 최근 말레이시아와 일본 등 해외업체와 매각협상을 진행중이었으나 금융권의 법적절차 착수로 이같은 노력도 물거품이 될 위기에 놓였다.
[광주·호남]냉온기류가 교차하는 서남권 조선단지를 가다
비슷한 시각 해남군 화원면 대한조선 도크. 6번째 벌크선박 건조가 한창인 이곳에서는 작업자들이 선박블록 합체작업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한켠에서는 지난 3월 진수돼 27~28일까지 제주해역 시운전을 앞두고 있는 17만500t급 벌크선의 막바지 점검 손길이 분주한 모습이다.

대한조선은 지난해 C&중공업과 함께 구조조정 대상으로 나란히 이름을 올렸으나 기업회생절차를 밟게되면서 운명이 갈렸다. 채권은행의 긴급자금 700여 억원이 투입되면서 3개월가량 밀렸던 직원급여가 모두 지급됐고 협력업체들도 납품대금을 받아 꽉 막혔던 숨통이 트이게됐다.
[광주·호남]냉온기류가 교차하는 서남권 조선단지를 가다




































서남권 조선단지엔 온도차가 극명한 냉온기류가 교차하고 있다. 마치 경기회복에 대한 엇갈린 전망처럼 한치앞을 예단하기 힘든 형국이다. 이런 가운데 서남권 조선업계에서는 대체적으로 지난해보다 올해가, 상반기보다 하반기가 더욱 혹독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구조조정이 이제 시작단계일뿐 진정한 경기회복을 맞기까지는 앞으로 견뎌내야 할 시련과 고통이 크고 많을 것이란 얘기다. 지역경기 전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산업은 서남권 경제비중의 70%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조선산업은 경기선행지표라는 특성상 지역경제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바로미터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남권 조선업계에서는 생존을 위한 다양한 자구책이 모색되고 있다. 신안 지도의 신안중공업은 수주가 안되자 일단 배를 만들어 판매하는 조선업계에선 전혀 새로운 마케팅방식을 고민중이며 영광의 TKS조선과 진도의 고려조선은 수리조선으로 업종을 변경한다는 계획을 적극 검토중이다.

국내 최대의 선박블록 집적화단지단지인 영암의 대불산단에서는 업체들이 그동안 부풀려만 왔던 몸집을 줄이느라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해까지 C&중공업 협력업체였던 H사 사장 김모씨는 “거제와 부산 등지로 일감을 찾아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다녔으나 소용이 없었다”며 “직원들을 내보내고 공장문을 닫은 이후 그동안 카드빚 등으로 신용불량자의 꼬리표를 달고 말았다”며 신세를 한탄했다. 이처럼 일감이 없어 휴업중인 업체만도 올들어 20여곳에 이른다. 산업단지공단 대불지사 관계자는 “선박수주가 급감하면서 산단주변에는 실직한 유휴인력들이 넘쳐나고 있다”며 “업체들 중에는 수십에서 수백억씩 들인 시설과 장비를 놀릴 수 없어 다른 업체의 물량을 재하청받아 출혈작업을 하는 진풍경도 벌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위기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몰아닥친 국제금융위기에서 비롯됐지만 내부자성론도 만만치 않다. 경기에 대한 예측을 소홀히하고 너도나도 조선업에 투자하면서 공급과잉을 불러왔다는 지적이다. 2005년이후 3년간 국내 조선업이 절정의 호황을 누리던 때 전남서남권에는 무려 26개의 중소형 조선업체가 목포와 해남 신안 영광 진도 등 지에 우후죽순 들어섰다. 지자체도 이를 부추겼다. 전남도는 잇딴 중형조선 공급과잉 경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를 4대지역전략산업으로 정해 업체 유치에 열중했다. 특히 목포시의 경우 최근 대양일반산단을 개발해 조선기자재부품 업체 등을 유치한다고 밝혀 업계의 구조조정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눈총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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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싹도 움트고 있다. 위기에 빛을 내는 업체들이 하나둘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대불산단내 블록제조업체인 E사는 요즘 주문물량이 밀리면서 3개월째 야근을 이어가고 있다. 6년전 설립때만해도 연매출 70억원에 불과했지만 불황을 거치면서 매출 200억원대 업체로 훌쩍 커버렸다. 이 업체 박모사장은 “납기와 신용을 생명처럼 여기며 인정을 받아 불황이지만 꾸준히 일감을 얻고 있다”며 “요즘 대불산단에는 야간에도 불을 밝힌 공장들을 간간히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목포대 박종환교수(서남권 중형조선산업 지역혁신센터소장)는 “지금은 구조조정을 통해 옥석도 가리고 제도적 보완책도 마련돼야겠지만 조선강국의 잇점을 살려 이번 위기를 시장개척여지가 무궁무진한 중형조선시장에서 입지를 강화하는 기회로 활용하는 발상의 전환도 필요하다“며 “투자금의 규모가 크고 회수기간이 긴 조선산업 특성상 국가적인 지원이 뒷받침되면 중형조선산업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목포=최성국 기자 skcho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