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4월23일 오후 3시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7층.미국 제너럴모터스(GM)와 채권단은 대우자동차 매각을 위한 본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미국 포드사가 인수 의사를 갑작스럽게 철회하면서 한국정부로서는 GM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믿었던 포드에 농락당한 채권단은 굴욕적인 조건으로 GM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7년 뒤인 지난 23일 오후 3시.같은 장소에서 닉 라일리 GM 아태본부 사장과 마이클 그리말디 GM대우 사장이 민유성 산업은행장을 만났다. 유동성 위기에 처한 GM대우에 긴급 자금을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서였다.

민 행장은 "GM 본사의 회생계획에 GM대우의 핵심적 역할 및 장기발전에 대한 GM의 보장 및 대주주로서의 지원이 반영돼야 한다"고 말했다. 민 행장 옆에는 2002년 당시 대우차 매각협상을 담당했던 한대우 부행장이 입을 굳게 다문 채 서 있었다. 이날 라일리 사장은 빈 손으로 돌아갔다.



◆심각한 GM대우 유동성 위기

산업은행은 지난 16일 신한 우리 하나 씨티 외환 HSBC 등 국내 및 외국계 12개 은행 외환업무담당 부서장을 불러 GM대우와 체결한 선물환 계약 중 5~6월에 만기가 돌아오는 계약의 절반을 6개월간 만기연장할 것을 요청했다. GM대우의 자금사정상 정상적인 결제가 어려울 수 있다는 설명과 함께 모든 은행들이 만장일치로 만기 연장에 동의해야 한다는 조건이 더해졌다.

GM대우의 자금사정이 급속도로 악화된 이유는 두 가지다. 미 GM본사의 파산설이 돌면서 전 세계적으로 판매가 급감해 GM대우가 미국과 유럽,중남미 등 GM해외법인에 판 차량 대금을 제때 받지 못하고 있는 데다 선물환 계약으로 엄청난 환차손을 입었기 때문이다. 원화 강세를 예상하고 공격적으로 선물환 계약을 체결한 것이 화근이었다.

GM대우는 수출대금이 들어온다는 전제 아래 지난해 달러당 평균 970원대의 환율로 13개 은행과 선물환계약을 체결했다. 이 선물환 계약의 잔액은 지난 2월 말 현재 82억1500만달러.연말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금액만 43억700만달러다. 이로 인해 올해 예상되는 환차손만 2조원이 넘는다. 환율이 1200원대로 떨어지더라도 9500억원 가까운 손실을 입게 된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수출대금이 정상적으로 들어오면 환차손을 입더라도 현금흐름을 유지할 수 있지만 미 GM본사가 파산절차에 들어갈 경우 채권과 함께 채무도 동결돼 GM대우는 심각한 자금압박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손실 분담 놓고 은행 간 치킨게임

은행들은 GM대우가 선물환 계약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그만큼의 손실을 떠안게 된다며 주거래은행인 산업은행이 나서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반면 산업은행은 GM대우에 대한 지원이 이뤄지더라도 이는 연구개발비와 회사 운영자금으로 사용돼야 하는 만큼 선물환 손실은 각 은행이 계약에 따라 공평하게 부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채권단 관계자는 "현재 상태라면 산은이 자금을 지원하더라도 상반기에만 1조원이 넘게 발생하는 선물환 손실을 메우는 데 들어가게 된다"고 우려했다. 선물환 만기연장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자칫 은행 간 채권회수 경쟁만 불러일으키고 GM대우 정상화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산업은행도 "만기연장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추가담보를 제공하겠지만 거부될 경우 다음에 제시되는 조건은 이보다 나쁠 것"이라며 "어느 한 은행도 무임승차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반면 일부 외국계 은행들은 본사의 지침을 따를 수밖에 없는 만큼 선물환 손실을 회수하기 위해 GM대우를 상대로 법적인 절차에 착수할 수 있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자칫 GM대우 처리를 놓고 은행 간 이견이 표면화되면서 치킨게임(2대의 자동차가 마주보고 달려 먼저 핸들을 돌리거나 차에서 내리는 사람이 지는 게임으로 다 망하고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계속하는 게임을 말한다. 치킨은 겁쟁이라는 뜻)이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대목이다.

◆재 · 보궐선거와 맞물려 혼란 가중

부평 본사를 비롯해 GM대우가 인천지역에서 고용한 인원은 1만7000명이 넘는다. 1차 협력업체만 52개로 고용인원만 1만5000여명에 이르고 3차 협력업체에 가족까지 포함할 경우 20만명이 GM대우의 향방에 목을 걸고 있다.

더구나 이 지역은 오는 29일 국회의원 재 · 보궐 선거를 앞두고 있다. 정부와 한나라당은 24일 GM대우 협력업체에 대해 정부산하 신용보증기관을 통해 2400억원의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고,민주당은 즉각 '선거용 공약'이라며 발끈하고 있다.

하지만 '사상 최악의 빚더미 추가경정예산'이라며 여당을 공격하던 민주당도 GM대우 지원을 위해 6500억원의 예산을 추경에 반영하라고 요구하는 등 GM해법을 둘러싼 정치적 이해관계까지 가세하고 있다. 여야를 떠나 모두 한 목소리로 GM대우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과 정상화를 공약으로 내걸면서 선거 후 적지 않은 후유증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근본적인 해법놓고 고심

정부의 또 다른 고민은 GM대우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방향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다. 캐나다 정부는 자국 내 GM 자회사들이 미래 생존력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파산을 허용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독일 정부도 GM의 자회사인 오펠을 파산시킬 수 있다며 GM의 선(先)지원 요구를 거절하는 등 자국의 산업정책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우리 정부도 지난 1월 지식경제부가 작성한 '주요 업종별 구조조정 방향'보고서에서 현재 5개인 완성차 업체를 3개 내외로 재편성해 집중육성할 필요성을 제기,완성차 업계의 구조조정 가능성을 시사했다. 다만 산업 간 전후방 효과가 크고 고용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점을 고려할 때 정부가 인위적인 구조조정을 시도하기는 어렵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한 · 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한 · 미 양국 간 통상문제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윤진식 청와대 경제수석은 24일 국회에서 "미국쪽에서 제의가 와 지식경제부와 미국 재무부가 경영정상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며 "미국 정부에(경영정상화 방안에 대한)협조를 요청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심기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