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최고 화가 김홍도의 작품과 이명기의 '서직수 초상''윤증 초상'을 주로 참고했습니다. 다산이 환갑 때 직접 쓴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과 정규영(丁奎英)의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등에 나타난 기록이 직접적으로 도움이 됐구요. "

다산의 새 초상화를 그린 김호석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17일 서울 종로구 동산방화랑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조선시대 사료와 회화 등 수많은 도판을 통해 다산의 얼굴을 되살리는데 주력했다"고 밝혔다.

강진의 다산초당에 내걸릴 가로 96㎝,세로 178㎝ 규격의 새 초상화는 측면을 응시하는 눈빛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완만한 선의 콧날과 꼭 다문 입술은 순수하고 단정하다. 머리엔 사방관을 쓰고,방대한 독서와 저술 활동으로 인해 시력이 많이 악화돼 돋보기 안경을 걸친 모습이 이채롭다. 어릴 적 천연두를 앓아 눈썹이 세 갈래로 갈라진 '삼미자(三眉子)'역시 사진처럼 정교하게 묘사됐다.

치밀한 고증을 위해 김 교수는 전남 강진과 다산의 생가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 지역을 50여 차례 답사하면서 다산의 원형을 찾아 나섰다. 미술사학자인 이태호 명지대 교수와 복식사 연구가 고부자 단국대 교수에게 자문도 받았다. 그는 사료에 나타난 기록만으로는 다산의 모습을 잘 표현할 수 없어 다산 후손들을 직접 만나 얼굴의 인상을 관찰했다.

"나주 정씨 월헌공파 종회를 찾아가 모임에 참석한 300여명의 후손들의 인상을 관찰했습니다. 종친회에서 만난 다산의 직계 후손 4명의 인상이 눈에 띄더군요. 머리숱이 그리 많지 않으며,눈썹과 수염은 적당하고 깔끔하더군요. 쌍꺼풀이 있는 큰 눈과 부드러운 눈매를 지녔어요. "

김 교수는 "다산 초상화에 정치사회적 격변기인 19세기 조선 사회를 살다간 지성인의 시대적 번뇌와 고민을 담아내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일반 인물그림을 그릴 때나 민주화 운동의 현장을 그릴 때보다 훨씬 필선을 아꼈다. 대신 넓은 붓을 대범하게 사용하고 막막한 지평선과 인자하면서도 지적인 모습을 살려내기 위해 속도감 있고 기세좋게 묘사해냈다. 인물의 얼굴과 손발은 한지 뒤쪽에 자연 염료로 수십번 덧칠해 청아한 피부색이 은은하게 배어나오도록 배채(背彩)기법을 사용했다.

"초상화는 사진처럼 정교하게 모사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사람의 정신까지를 어우러야 합니다. 외모만이 아니라 대상 인물의 마음과 정신을 담아야 한다는 전신(傳神 · 정신을 전함)을 담아내야 하거든요. "

김 교수는 그동안 성철 스님,안창호 · 김구 선생의 초상을 그리는 등 우리 시대의 정신성과 삶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데 몰두해왔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