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양주팔괴(揚州八怪)라는 말이 있다. 18세기 청(淸) 중엽을 살았던 8명의 괴짜 문인화가를 지칭하는 말이다. 강남의 번화한 도시 양주를 무대로 활약했던 이들은 파격적인 화풍 못지않게 삶의 방식 또한 자유분방해서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룹의 좌장격이자 유일하게 과거급제자였던 정판교(鄭板橋, 1693~1765)는 시 · 서 · 화에 두루 능한 삼절(三絶)로도 호가 높았지만 '돈을 말하지도 만지지도 않는다'는 사대부의 불문율을 깬 예술사적 사건으로 특히 유명하다. 작품의 가격을 스스로 매긴 '판교윤격(板橋潤格; 정판교가 그린 그림값)'이 그것이다.

"대폭(大幅) 6냥, 중폭 4냥, 소폭 2냥, 족자나 대련은 1냥… 예물이나 음식보다 현금을 환영함. 현금을 받으면 내 마음이 기뻐져 작품이 절로 잘되기 때문임(送現銀則心中喜樂,書畵皆佳)."

평생 불우했던 그가 나이 오십이 넘어 지낸 산동지방의 현령 11년 동안에는 빈민을 보듬는 선정(善政)을 편 탓에 악덕관리와 지방부호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결국 이것을 못견뎌 사직한 그를 현 백성들이 모두 나와 통곡하며 전송했는데, 그의 행장은 자신과 길 안내인, 짐을 태운 당나귀 세 마리가 전부였다고 한다. 그가 떠난 뒤에도 사람들은 집집마다 그의 초상화를 그려놓고 산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다.

현령 시절 정판교는 자칭 '바보 늙은이(糊塗老人)'의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묵은 일이 있다. 이름과는 달리 노인에게 풍기는 대인의 풍모에 압도당한 그는 기념으로 '이처럼 바보인 척하기도 어려워라(難得糊塗)'라는 글을 써주고 이렇게 낙관(落款)했다.

'강희에 수재, 옹정에 거인, 건륭에 진사된 정판교(康熙秀才, 雍正擧人, 乾隆進士)'

이에 호도노인은 답글 하기를 '미석(美石)은 얻기 어렵고, 잡석은 더 얻기 어려워라. 운운'한 다음 역시 도장을 찍었다.

'초시 일등, 향시 이등, 전시 삼등한 아무개(院試第一, 鄕試第二, 殿試第三)'

거들먹거리다가 보기좋게 한방 먹고 돌아온 정판교는 '난득호도'라 제(題)한 아래에 이렇게 덧붙였다.

'총명하기 어렵고 멍청하기도 어렵다. 총명한 이가 멍청하게 살기는 더 어렵다. '

정판교는 내친 김에 '흘휴시복(吃虧是福; 손해를 보는 것이 곧 복이다)'이라는 작품도 쓰고 주를 달았다.

'내가 손해보면 남이 이익을 보는 법(損於己則盈於彼). 그가 이익을 보고 나는 마음에 편함을 얻으니 어찌 복이 아니랴!"

정판교의 두 메시지는 유독 처세술을 좋아하는 중국인 사이에 내용이 덧붙여지면서 마침내 '난득호도경(經)'(일명 바보경)이라는 경전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노자의 '대교약졸(大巧若拙)'이나 채근담의 '세상살이엔 손해보는 것이 나를 높이는 길(處世,讓一步爲高)'보다 훨씬 사랑받는 경구라고 한다.

김수환 추기경은 스스로 '바보'로 살다가 선종했다. 어수룩한 자화상에 '바보야'라고 쓰고 "안다고 나대고 대접만 받을려고 한 내가 바로 바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고 다녔다. 누가 칭찬이라도 할라치면 "아이고, 날 칭찬하지 마세요. 살아서 받을 칭찬을 다 받으면 하늘나라 가서 받을 게 없어요"라고도 했다.

뜻있는 인사들이 추기경의 바보정신을 받들어 물질만능과 경쟁에 강퍅해질 대로 강퍅해진 우리 사회를 구원하는 조그만 운동을 준비한다고 한다. '살면서 손해도 좀 보고 남도 배려하는' 사회를 되찾자는 취지이다. 얼마 전 만해도 우리 주변에는 바보들이 많았다. "너 바보지?" 하고 놀려도 사람 좋은 웃음을 가득 흘리며 세상을 넉넉하게 만들어 주던 그들이었다. 잘 살게 되면서 우리는 자신과 자식까지 영악스럽게 만들지 못해 안달을 떨었다. 부모들이 결자해지(結者解之), 바보처럼 손해도 좀 보며 살자.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