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과장은 얼마전 팀 송년회를 했다. 처음엔 '112 송년회'를 지향했다. 회식비가 절반으로 줄어'1차에 1가지 술로 2시간 이내'에 끝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후 6시에 시작한 송년회는 오후 9시 조금 넘어 끝났다. 그랬더니 후배사원이 '119 송년회'라고 불렀다. '1차에 1가지 술로 오후 9시까지 끝내는 송년회'라는 의미란다. 다른 부서는 돈이 없어 점심송년회를 했다고 한다.

김 과장은 직장생활 10년째다. 올해 초임 과장 직책을 달기까지 1차로 끝나는 송년회를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를 반기는 직원도 있었지만,좋지 않은 경기 탓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하니 김 과장의 마음은 뒤숭숭하기 짝이 없다. 비단 김 과장만이 아니다. 전국의 김 과장 이 대리가 모두 비슷하다. 이들이 믿을 건 그래도 '사장님'뿐이다. 수많은 김 과장 이 대리가 연말을 맞아 사장님께 보내는 편지를 모았다.

#새해엔 장기휴가 없었으면 합니다


여기 동해안입니다. 초등학생인 두 아이는 신이 나 있습니다. 매일 늦던 아빠와 함께 노니 즐겁다고 합니다. 저는 10일간 장기휴가를 받았습니다. 공장이 문을 닫으니 사무직도 할일이 없어져 교대로 휴가를 '즐기고' 있습니다.

어찌 사장님 탓이겠습니까. 그렇지만 월급쟁이인 저희들로선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건 비밀인데요. 저희 옆 사무실 차장 한 분은 지금 열심히 자동차 정비기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가려 하는데 그러자면 먹고 살 기술이 필요하다고 하네요.

결례인 줄 압니다만,인터넷에 떠도는 '담쟁이 넝쿨'이란 시를 소개할까 합니다. '김과장이 담벼락에 붙어 있다/이부장도 담벼락에 붙어있다/서상무도 권이사도 박대리도 한주임도/모두 담벼락에 붙어있다/떨어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밀리지 않으려고/납작 엎드려 사력을 다해/견뎌내는 저 손/때로 바람채찍이 손등을 때려도/무릎팍 가슴팍 깨져도/맨손으로 암벽을 타듯이/엉키고 밀어내고 파고들며/올라가는 저 생존력/모두가 그렇게 붙어 있는 것이다. ' -B그룹 L과장

#아래 사람에게 귀기울여 주십시오

요즘 사내분위기가 흉흉합니다. 직원의 10%가량을 자른다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다들 말이 없어지고 술도 잘 마시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우리 부장은 좋아하던 사우나에도 발길을 끊은 눈치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우리 조직에서 죽어라 일하는 직원만 일할 뿐 노는 직원은 항상 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조조정을 하려면 진짜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을 제대로 가려달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간부들(임원들과 지연 혈연 학연으로 연결돼 있음)이나 기획실 직원(다 학맥으로 연결돼 있음) 얘기만 듣다보면 피해보는 사람이 나올 겁니다. -A공기업 K대리

#대통령님,믿어 주십시오

공무원이 되기 전에는 대통령들이 그렇게 좋은 자리에서 계시면서 왜 그것밖에 못할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제가 공무원이 되고 보니 그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주변에 있는 민원인들조차 만족시키지 못하는 자신을 보니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얼마나 힘들지 약간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됐습니다. 대통령께서 보실 때는 미흡하겠지만 중앙 부처 공무원 대부분이 어느 대기업 직원 못지 않게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대통령을 믿듯이 대통령께서도 공무원들을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한 중앙부처 사무관

#빈틈도 보여주시면 좋겠습니다

임금삭감은 절대 없다는 약속을 지켜 주신 것 정말 감사 드립니다. 특히 여직원들을 위해 창고를 개조해 휴게실을 만들어주신 것 고맙습니다. 다 알아서 해주시니 큰 불만은 없어요. 하지만 좀 바뀌었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너무 진지하고 심각하십니다. 목소리도 늘 낮게 깔고 잘 웃지도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좀 허술한 모습도 보여주시고,실수도 하는 모습 보고 싶어요. 새해엔 사장님이랑 메신저 채팅도 하고 노래방에도 가고 싶습니다. 사장님 파이팅. -T화학 S과장

#무조건 고맙습니다

하반기부터 일감이 절반 이하로 줄어 드니까 사장님께선 은행과 사채시장으로 돈꾸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으셨죠."시중에 돈줄이 완전히 막혔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시던 모습 생생합니다. 어느날은 한 중소기업 사장이 직원들에게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미안하다"며 파산선언한 기사를 보며 한숨짓기도 하셨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꼬박꼬박 월급을 받았습니다. 지난주에는 휴가비도 주셨고요. 우리같은 조그만 하청 업체에서 정말 좋은 사장님을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돈이 사장님 아파트를 담보로 마련하셨다는 얘기를 뒤늦게 들었습니다. 어느 역술인이 그랬다지요. 새해는 어둡겠지만 새벽은 더욱 밝을 것이라고.힘내세요,사장님. -PCB업체 경리주임

#여기는 군대가 아닙니다

장교 출신임을 자랑하시는 사장님! 여기는 군대가 아닙니다. 몰아붙이기식 경영은 이제 바꾸셔야 합니다. 우리 조직은 참고,믿어주는 기다림의 미학이 필요한 곳입니다. 이젠 'Working Hard'가 아닌 'Working Smart'란 트렌드가 대세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원들의 따끈따끈한 생각들을 잘 조합할지 고민해 주셔야 합니다. 내년이 소띠 해라고 해서 소 같이 열심히 일하라고만 하시면 많은 사원들이 소 퍼지듯이 퍼질 것입니다. 조금만 바꿔 주세요. 사장님의 정감 넘치는 말 한마디.그것은 우리에게 산삼과도 같습니다. -대기업 P사 S과장

#평가제도 좀 바꿔 주세요

사장님께서 올해 멀티평가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시행해 보니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같은 부서에서 일해보지 않으면 사람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인데요. 평가를 잘 받기 위해 평소 이런저런 사내정치에 더 신경쓰는 부류들이 생겨나는 모습도 보입니다. 강제할당하다 보니까 나이 어린 순서대로 한 번씩 총대 메는 식이 됩니다. 새해에는 사장님의 소신을 기대하겠습니다. -대형건설회사 C대리

#새해에도 희망을 얘기하길 바랍니다

은행장님.개인적으로나,은행으로나 참 힘든 한 해였습니다. 개인적으론 아파트를 장만했는데 실수였던 것 같습니다. 그 보다는 펀드 손실을 둘러싸고 고객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게 더 힘들었습니다. 은행장님도 정말 힘들었을 겁니다. 언론을 보면 금융회사를 구조조정한다는 등 좋은 소식은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우리 은행은 다행히 아직 인력 구조조정 얘기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새해에도 이런 분위기를 이어가 직원들이 '희망'을 얘기했으면 합니다. -A은행 김 과장

이관우/정인설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