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칠성씨(사진ㆍ43)는 잊기 위해서 술을 마셨다. 술을 먹으면 자신을 서럽게 한 세상의 모든 이들을 지워버릴 수 있었다. 일당을 주지 않고 도망간 건설현장 간부도,몸도 마음도 멀어져버린 두 딸과 아내도 술을 마시는 순간 만큼은 생각나지 않았다.

성삼재에서 출발해 계속해서 어색한 침묵을 지키던 이씨는 임걸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 "산을 오르는 것은 술을 마시는 것과 정 반대의 일인 것 같다"며 첫마디를 뗐다. 산 위로 한걸음을 옮길 때마다 생각이 자꾸만 많아진다고 했다. 지나온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고도 했다. 자신이 말해놓고도 어색한지 노숙자들과의 싸움(?)에서 빠진 앞니의 빈자리를 휑하게 드러내놓고 웃었다.

이씨는 전문적인 페인트공이었다. 경남 산청이 고향인 그는 1995년에 부산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솜씨가 좋아 여러 건설 현장에서 그를 불렀고 고정적인 수입도 있었다. 문제는 1997년 자신이 일한 공사장의 중간 책임자가 시행사에서 대금으로 받은 돈을 갖고 자취를 감추면서 시작됐다. 경찰서부터 지방자치단체와 정부부처를 돌아다니며 하소연을 해도 돈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외환위기가 닥쳤고,경기에 민감한 건설현장이 가장 먼저 된서리를 맞았다. 일자리는 절반 이하로 떨어졌고 그래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가족과의 사이도 멀어졌고 갈등이 회복되지 않자 이씨는 1998년 홀로 인천 영종도 공항공사 현장으로 왔다.

"그 때는 나 하나만 없어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았어요.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드니 떠나는 게 나을 것 같았죠.결국 몸이 멀어지니 마음도 멀어지더라고요. "

혼자 지내게 되니 술을 마시는 시간도 많아졌다. 소주 7~10병을 한 자리에서 먹었다. 페인트칠을 할 때는 손끝의 정교함이 필요한데 술을 마신 다음 날에는 붓을 잡기가 힘들었다. 일이 줄었고 집세를 내지 못해 여관에서 지내는일도 많아졌다.

이어지던 이야기는 첫째날의 가장 힘든 코스였던 토끼봉을 오르기 시작하자 잠시 멈췄다. 침묵 속에서 규칙적으로 거친 숨소리만 터져 나왔다. 조용한 가운데서도 이씨는 사람들을 챙겼다. 높은 바위가 나타나면 "잠시 기다려보라"며 먼저 올라서서 기자를 끌어줬다.

토끼봉 정상에서 잠시 한숨을 돌릴 때 이씨는 "지금처럼 술 말고 다른 세상이 있는 줄은 몰랐다"며 말을 이었다. 그는 술로 더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자 몸을 의탁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지하철 정보지에서 본 '내여집'을 용기내서 찾았고,가장 먼저 부천알코올병원을 소개받았다.

"정말 충격이었어요. 난 내가 알코올 중독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나도 거기에 있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치료받기로 마음먹었어요. "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알코올을 극복했다는 생각에 '내여집' 문을 스스로 나올 때마다 다시 술병에 손을 댔다. 그리고 지난 4월 독한 마음을 먹고 내여집을 세번째 찾아왔다. 이씨는 이제 술만 이기면 모든 것이 잘될 것 같다고 한다. 평생 자기와의 싸움도 각오하고 있다. 암은 완치될 확률이라도 있지만 알코올 중독은 평생 완치될 수 없는 병이기 때문이란다. 한 잔만 마셔도 무너지는 사람들을 많이 봐서 마음 약하게 먹으면 안된다고 늘 되뇌인다.

이씨는 8월부터는 병원에서 나와 내여집에서 다른 재활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혈압이 약간 높긴 하지만 간 상태도 좋아졌고 손 떨림 증상도 더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공사 현장의 동료들이 쉬는 시간에 막걸리를 권할 때마다 곤욕을 치르긴 하지만 그래도 이젠 거절하는 방법도 많이 터득했다. 경기가 안좋다보니 4~5년 전 15만원이던 일당이 요즘은 12만원으로 줄었고,일자리도 그때의 절반에도 못미치지만 그래도 꿈이 있어 행복하단다.

"내여집에서 자립하게 되면 조그마한 페인트 가게를 내고 싶어요. 그 땐 부산에 있는 딸아이들을 불러서 용돈도 주며 함께 살수 있겠죠."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