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역사를 갖고 있는 러시아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황제가 표트르다. 이름에 대제라고 붙는 그는 18세기초 러시아를 낙후된 유럽의 변방국에서 저력있는 강국으로 키웠다. 오랜 전쟁과 혁신적인 조치로 이후 200년간 제국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푸틴 총리가 대통령 때 표트르의 초상화를 사무실에 걸어놓았다는 것을 봐도 러시아인들에게 다가서는 그의 이미지를 짐작해볼 만하다.

그에 대한 일화는 적지않지만 황제의 성격을 가늠해볼 수 있는 일이 있다. 서유럽의 과학ㆍ기술을 존중하던 그는 자리에 오른지 얼마되지 않아 250명의 사절단과 함께 서방 견문에 나선다. 그러면서 자신은 이름을 바꾸고 신분도 위장해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조선소에서 작업공으로 직접 기술을 배운다. 이 정도면 단연 위장취업의 원조다. 4개월간의 선박노동자로 그는 조선기술을 배웠다. 귀국해 이를 기반으로 함대를 구성해 북해로도 진출한다. 그 기점이 제정 러시아의 수많은 문화유산을 안고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다.

표트르와 같은 러시아의 황제가 바로 차르다. '보통 왕국'의 군주보다 더 강력한 제왕,왕중의 왕,'제국'의 군왕이 황제 아닌가. 역사적으로 많은 나라가 제국을 표방했지만 명실상부한 실제 제국은 많지 않았다. 고대 로마,명과 청,오스만투르크,19세기 영국,칭기즈칸의 몽골 정도일까. 투르크족의 황제 술탄이 그렇듯,차르도 차르만의 독특한 이미지가 있다. 절대권력과 강력한 리더십,냉혈 통치와 팽창주의….

이런 이미지를 노린 것일까. 미국이 GM 등 자국의 자동차 '빅3'의 구조조정과 구제금융을 총괄 감독할 집행자를 '자동차 차르'(Car Czar)라고 하는 점이 흥미롭다. 말도 많고 탈도 적잖을 구조조정에 군말 말고 관련자들은 모두 미리미리 순종하라는 의미가 깔려 있을 것 같다. 차르처럼 강한 조치를 할 것이라는 경고도 포함된 듯하다.

빅3가 자동차 역사에서 제국의 위세를 누렸던 점을 보면 차르라 해도 어색하지 않다. 이 자리가 실제로 세계 차산업의 차르로 부각될 가능성도 있다. 특히 빅3를 잘 다뤄 경쟁력있게 살려놓고 경영권까지 지배하면 현대판 차르다. 문제는 어제 미상원에서 구제법안이 처리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팔순의 금융노장 폴 볼커가 유력 후보로 검토된다는 소식도 있어 관심거리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