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BIS 비율의 역설'에 빠졌다. 극심한 경기침체와 신용경색을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시중에 돈이 돌게 해야 하는데,은행들은 국제결제은행(BIS)기준 자기자본비율이 떨어질까봐 돈줄을 꽉 조이고 있다. 은행들의 건전성 추구가 국가 경제에 득(得)이 되기 보다는 오히려 독(毒)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개별 경제주체 입장에서는 합리적이고 최선의 노력이 경제 전체에는 오히려 해를 끼치는 '구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가 나타난 대표적 사례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본격화한 지난 9월 이후 한국은행이 은행권에 푼 돈만 35조원(외화포함)이 넘는다. 지난 11일에는 기준금리를 사상 최대폭인 1%포인트 인하했다.

하지만 은행들은 대출 확대에 여전히 소극적이다. 지난 11월 중 은행들의 기업대출 증가액은 3조5000억원으로 10월(7조3000억원)에 비해 '반토막'이 났다. 일부 우량기업이나 담보가 확실한 경우가 아니면 대출받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기업인들은 아우성을 치고 있다. 심지어 대출을 해주는 대가로 은행이 발행하는 후순위채를 사들여야 하는 등 '꺾기'마저 극성을 부리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은행들은 "당장 내 코가 석자인데 어떡하란 말이냐" "외국인 주주 중에선 중소기업대출 등 위험여신을 줄이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하기도 한다"고 항변하고 있다.

지난 9월 말 국내 은행(시중은행과 지방은행)들의 평균 BIS 비율은 10.6%다. 부실은행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이 '8%'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직 양호한 수준이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는 게 은행들의 생각이다. 지난 3~4년간 12% 안팎을 유지하던 BIS 비율이 최근 경기침체가 본격화되면서 급속히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한득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불과 몇 개월 전만해도 외형 확대를 위해 경쟁적으로 대출을 늘리던 은행들이 경기가 급속히 꺾이면서 BIS 비율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다"며 "BIS 비율 하락을 막기 위해 대출을 줄이면 경기가 더 나빠지고,경기를 살리기 위해 대출을 늘리면 은행의 BIS 비율이 더 떨어지는 모순적인 상황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BIS 역설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BIS 자기자본비율 규제를 대폭 완화하면 간단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우선 미국 유럽 등 선진국들이 가만히 있는 상황에서 한국만 '나홀로 규제완화'에 나서면 국내 은행들의 대외신인도가 추락할 수 있다. 선진국과의 공조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안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달 24일 미국 출장 중 "BIS 비율 때문에 생기는 대출 위축 문제 등에 대해 앞으로 국제사회에 제안을 하려고 한다"고 말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일부에선 '스페인 모델'을 해법으로 거론하기도 한다. 경기 호황 때 대손충당금을 추가로 적립하도록 하고 불황기에는 추가 적립된 대손충당금을 써 대출 여력 약화를 방지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안 역시 현실적으론 쉽지 않다. 전효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스페인 말고 그렇게 하는 나라가 또 있다면 모를까 다른 나라들은 그냥 BIS가 제시한 기준을 따라가고 있다"며 "딱 떨어지는 해답이 없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일부 국가가 적용하는 사례를 따라가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정부와 금융감독당국은 은행에 자본 확충을 강력히 권고하고 나섰다. 그 방식도 '은행의 기본자본(후순위채 등 보완자본을 뺀 순수 자기자본)비율을 얼마로 높여라'가 아니라 '0000억원을 증자하라'는 식으로 구체적인 금액마저 제시하는 과격한 방법을 동원했다. 은행별로 기본자본비율을 9%로 높이라고 지시할 경우 각 은행이 유상증자 등을 통해 자본금을 늘리기 보다는 대출자산을 줄이는 손쉬운 방법을 택할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기본자본비율은 '기본자본'을 '위험자산'으로 나눠 산출한 비율인데,이 수치를 높이려면 분자인 기본자본을 늘리거나 분모인 위험자산을 줄이면 되기 때문이다. 금감원은 유상증자 등 자본확충을 통해 기본자본비율을 9%로 늘릴 경우 전체 BIS 비율은 은행별로 11~15%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은행에 자본을 투입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은행들의 기본자본비율을 평균 9%로 끌어올리는 데 들어가는 돈은 10조원이 넘는다. 은행들이 배당금 축소나 유상증자,30년 만기의 하이브리드채권 발행 등으로 이 돈을 확보하면 시중의 돈은 그만큼 마를 수밖에 없다. 은행의 재무건전성 추구가 자금시장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