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다롱 눈이 부셔라 우리 동네 꽃동네
꽃이 피는 거리마다
다정하게 손잡고 노래하며 걸어가면
바람타고 살랑살랑 꽃비가
향긋한 비가 내려요
꽃비 꽃비가 내리면 파란꿈이 익어가지요.
사뿐사뿐 내리는 비




조금은 도회적인 느낌을 주지만 이대원의 작품을 만나면 떠오르는 '꽃비'라는 동요다. 그의 그림은 꽃비이자 색의 비이기도 하다. 하늘에서 내리는 색과 꽃이 일순간 화면에 정지되면 한 장의 그림이 된다. 이렇게 꽃비를 내리게 하는 그는 하늘나라 '우사(雨師)'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작품은 항상 밝고 화려한 색채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울긋불긋한 그런 색채가 아니다. 따라서 속되지 않다. 그리고 그 색채들은 하나의 형태를 이뤄,산이 되고 나무가 된다. 먹음직스러운,그렇다고 먹기에는 너무 튼실하고 탐스러운 과일들이 된다. 그냥 보는 그림이 아니라 마음을 풍성하게 해주는 속이 여문 그림이다.

게다가 그의 그림은 세상과 떨어져 있지 않고,우리네 삶의 외연인 일상과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낯설거나 멀리 있다는 느낌이 없다. 편안하고 즐겁다.

마치 경쾌한 폴카처럼 리듬을 타고 아름다운 원색의 점과 색이 화폭을 적셔 들어간다. 그의 그림은 음악과 같다. 색이 춤을 추며,하늘에서 내려와 화면에 쌓인 아름다운 화음과 색의 중첩은 색의 향연에 초대받은 분위기다. 그의 작품은 이렇듯 시각적으로 아름답고 서정적이며 목가적이다.

그리고 독창적이다. 그는 색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많은 실험을 하고 있지만,주저함과 망설임이 없다. 눈부신 자연에서 경험한 신비로운,빛나는 색을 화면에 표현할 방법을 체득했던 화가다. 화가이기 전에 들판에서 과수원에서 색으로 농사를 지었던 농사꾼이란 표현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색에 관한한 누구의 추종도 불허하는 감각을 타고 났다.

그는 아무리 바빠도 주말이면 자신의 부친이 물려준 파주의 농장에 내려갔다. 가서 쉬는 게 아니라 자연을 공부하고 관찰하고 표현하기를 거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이런 노력을 애써 드러내려하지 않았다. 주어진 삶의 조건 속에서 꾸준히 묵묵하게 자신의 걸음을 옮겨갔다.

한국현대미술사에 있어서 큰 족적을 남긴 그가 법학을 전공했단 사실을 알면 사람들은 놀란다. 일제 당시 한국인에게는 한정적으로 입학이 허락됐던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출신이다. 하지만 그는 필시 화가였다. 왜냐하면 이미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 재학당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자수로 입선을 했고,이후 유화로 입상하면서 장안에 화제를 몰고 다녔다. 선친의 반대로 법학을 전공해야 했던 그는 졸업과 함께 이내 법을 전공한 화가로 살았다.

그는 꾸준히 그림을 그렸고 화가로서,교육자로서,남편으로,아비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다. 그렇다고 어찌 인생에 고비가 없고,어려움이 없었을까. 그러나 그는 누구에게도 그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행복한 사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또 언제나 남의 말을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또 다른 별명은 '화단의 신사' 또는 '화단의 귀족'이었다. 후덕함과 넉넉한 인품 덕에 얻은 별호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나 삶의 방식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 바탕에는 민초들의 삶에서 우러나고 빚어지는 서민적인 수수한 아름다움이 배어난다.

마치 빛 좋은 날 숲에 들어가면 나뭇잎 사이로 눈부시도록 빛나는 태양처럼 그리고 일년 농사를 마치고 풍작에 감사하면서 마을전체가 잔치를 벌이는 것처럼 그런 흥취가 있다. 그의 이런 미학적 태도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인들의 미감을 두고 '민예미'라 상찬을 아끼지 않았던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과 그 예술'을 직접 번역 출간한 그의 행적에서도 나타난다.

인간에 대한 존중을 통해 자신의 삶과 그림을 일치시킨,소탈하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았던 그의 모습. 3주기를 맞는 그의 전시(갤러리현대 강남점ㆍ14일까지)에서 다시 만나며 그의 그림 또한 그와 진정 닮았다는 생각을 지울 길 없다.

언제 또 다시 그와 같은 이를 만날 수 있을까.

글=정준모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ㆍ미술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