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상무>

핵심산업 위주 선택과 집중, 글로벌 산업구조 개편 대비를

정부가 드디어 기업 구조조정의 칼을 빼들 모양이다. 외환위기 때 세계가 놀랄 만큼 기업 부실을 정리하고 회생을 유도한 '기업 구조조정위원회'의 부활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 구조조정은 원칙적으로 시장 기능에 맡겨 자율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지금 국내외 경제 상황이 빠르게 악화되는 데 있다. 미국발 글로벌 금융 위기가 실물 경기로 전이되더니 이제 세계적인 산업 구조조정 단계로 옮겨가고 있는 까닭이다. 세계 경제가 본격적인 경기 침체 국면에 진입하면 그 어디보다 그동안 집중 투자가 이뤄진 아시아 국가들의 조선,자동차,철강,반도체,석유화학 같은 주요 산업은 심각한 공급 과잉 상태에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전개될 사느냐 죽느냐의 살벌한 글로벌 생존 게임에서 국내 산업과 기업들이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정부가 나서서라도 선제적 구조조정 전략을 수립하고 이를 적극 추진하는 것이 시급하다.

하지만 지금의 구조조정은 외환위기 때와는 전혀 성격을 달리해야 한다. 외환위기 당시는 죽어가는 기업을 정리하는 사후적 구조조정이었다. 현재는 살 만한 기업들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지속적으로 살려주는 사전적 구조조정이어야 한다. 물론 살려야 할 대상을 선정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자칫 실수라도 하면 막중한 사후 책임을 져야하는 것도 큰 부담이 된다. 그렇다고 설마설마하며 머뭇거리고만 있을 수도 없는 딱한 상황이다. 저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글로벌 산업 구조조정이라는 쓰나미가 순식간에 밀려온다면 국내 산업은 손도 못써보고 복구하기 힘든 타격을 받게 된다.

세계적인 산업 구조조정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선제적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국내 산업의 재편이 진행돼야 한다. 단순히 부실기업을 정리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번 기회에 국내 산업의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이는 산업 구조 고도화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선 외환위기 때 저승사자 역할을 했던 '기업구조조정위원회'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구조조정 기구가 필요하다. 정부와 금융기관 그리고 기업이 함께 참여하는 '국내 산업 경쟁력 강화단(가칭)'을 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죽일 대상이 아니라 살릴 곳을 정해야 한다.

각 산업의 중장기 경쟁력 증대 방향과 조건을 정하고,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기업들을 집중 지원하는 것이다. 이러면 자연히 부실 부문이 정리되고 자원의 선택적 집중이 이뤄질 수 있다. 당연히 지원받는 기업들의 자구 노력 의무 조항도 명확히 제시해 기업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논란도 잠재워야 한다.

이와 함께 기업들의 자율적 구조조정을 보다 촉진하기 위해 기업 인수ㆍ합병(M&A)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 이른바 대기업을 통째로 팔고사는 '빅딜 시장'에서 각 사업 부문을 떼내어 거래하는 '스몰딜 시장'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대내외적으로 유동성 부족이 심각하고 미래 경기가 불안한 상황에서 거대 자금이 소요되는 빅딜은 인수-피인수 기업의 공멸 위험성을 높인다.

따라서 동일 산업 내 기업들이 서로 비교우위가 있는 사업 부문에 역량을 집중하는 사업 교환을 추진하거나,이종 산업 간에도 기업들의 사업부별 거래가 촉진되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를 통해 각 기업은 군살을 줄이고 핵심 역량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미래 성장 분야에 대한 신규 투자를 늘릴 수 있게 된다. 공정거래법상의 독과점 제한과 같은 시대에 맞지 않는 규제의 과감한 철폐와 회사 분할 절차의 간소화 같은 제도 개선이 이를 위한 시급한 과제다.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경제난을 역설하기보다는 이를 완화하고 해소할 수 있는 대책들을 일관되고 체계적이며 신속하게 추진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