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 객원 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달러 약세 속에 유독 원화만 왜 약세인가.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부실 사태 이후 국제 외환시장에서는 주요 통화에 대해 달러 약세 추세가 지속되고 있다. 엔ㆍ달러 환율만 하더라도 90엔대 중반까지 떨어졌다(엔화가치 상승).

그런데도 국내 외환시장에서는 달러에 대한 원화 약세 국면이 지속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폭도 유난히 크다. 이 때문에 원화 가치는 엔화,위안화 등 다른 통화에 대해 동반 약세를 보이고 있다.

원화 가치만 약세를 보일 정도로 한국 경제 여건이 나쁜 것인가 하는 점에는 의문이 든다. 경제성장률은 3%대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달 열렸던 G20회담에 참가한 다른 정상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아직까지 나쁘지 않다. 다른 요인이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 자본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미국의 부실 금융사들이 한국 증시에서 집중적으로 돈을 빼가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외국인들은 올 들어 국내 증시에서만 41조원이 넘는 주식을 순매도했다. 최근 들어서는 채권마저 처분하는 외국인들이 늘어 지난 10월과 11월 두 달간 6조원가량의 외국인 채권 순매도를 기록했다.

외국인들은 전 세계 금융시장에서 증거금 부족분을 보전해 달라는 마진 콜이 발생할 때마다 한국 주식이나 채권 등을 매도해 자본을 회수하고 있다. 국내 증시에서 주식을 팔면 그 대금은 원화 자금이기 때문에 국내 외환시장에서 원화를 팔고 달러화를 교환하는 과정에서 당초 예상과 달리 달러가 강세를 보이게 된다. 헤지펀드들이 마진 콜을 당할 때 한국에서 가장 먼저 자본을 회수하는 관행은 국제금융시장에서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외환당국의 효율적인 외환관리와 감독이 잘 이뤄지지 않는 것도 원화가 유독 약세를 보인 요인으로 오래 전부터 지적돼 왔다. 지난해 9월 이후 주가가 크게 오르자 이를 겨냥한 수익 목적으로 감독이 소홀한 틈을 타 시중은행들의 해외 차입이 무분별하게 이뤄졌다. 당시 시중은행 여건상 만기가 1년 이상의 장기 차입은 불가능했다.

외화운용의 가장 초보적 원칙인 차입과 만기 기간을 일치시켜야 하지만 시중은행들은 좀 더 높은 수익을 내기 위해 1년 이상 장기 자산에 투자했다. 하지만 1년 후 해외차입분 만기가 돌아오자 장기투자자산을 쉽게 회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해외 차입마저 여의치 않자 국내외환시장에서 달러를 구해 상환하는 과정에서 원ㆍ달러 환율이 급등했다.

외환보유액이 급감해 순채무국으로 전락한 것도 원인이다. 추가적으로 환율이 상승할 가능성이 높을 때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 달러 사재기에 열을 올리는 일부 시장참여자들의 이기적인 행동도 원화 약세 요인으로 가세해 왔다.

이진우 NH선물 부장은 "올해 기업들이 키코 피해 등으로 상반기 영업이익의 약 60%를 환손실로 까먹은 것은 주거래 은행인 시중은행들의 예측이 틀린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며 "하지만 감독을 소홀히 하거나 외화운용을 잘못한 정책당국의 책임도 크다"고 꼬집었다.

[용어풀이]

마진 콜(margin call)=선물계약의 예치증거금이나 펀드의 투자원금에 손실이 발생할 경우 이를 보전하라는 요구를 말한다. 투자자들뿐 아니라 돈을 빌려준 금융회사들도 마진 콜을 받을 수 있다. 마진 콜을 받으면 자금을 즉시 보충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투자자산 회수에 따른 자산가격 하락과 유동성 확보로 인한 유동성 경색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마진 콜에 응하지 못할 경우 거래소는 자동반대매매(청산)를 통해 거래계약 관계를 종결시킨다. 원래는 선물거래에서 사용되는 용어였으나 펀드 등에도 일반화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