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구 (수석논설위원 bklee@hankyung.com)

두 가지 'D'의 망령이 세계경제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디플레이션(Deflation.물가하락)과 디레버리지(Deleverage.차입축소)가 그것이다.

디플레 망령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난달 미국 소비자 물가지수는 석달 연속 하락세를 이어갔고 일본의 기업서비스 물가지수도 27개월 만에 내림세를 나타냈다. 영국 소비자물가가 4.5%나 떨어지는 등 유럽권 또한 마찬가지다. 특히 선진국 경제가 내년에 마이너스 성장을 면치 못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인 가운데 주식 부동산 등 자산디플레가 진행되고 있고,원자재 가격도 하락세로 돌아서 우려가 더욱 고조되는 양상이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몇 달 전만 해도 인플레가 문제였지만 내년에는 디플레 걱정을 해야할 것"이란 경고도 내놓았다.

디플레는 인플레이션(물가상승)보다 더 무섭다고들 한다. 소비둔화 생산위축 고용감소 경기침체 등의 악순환이 이어지면서 경제 전체가 무기력증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은 까닭이다. 버블경제 붕괴 이후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의 수렁에 빠졌던 일본의 사례는 이를 단적으로 입증한다.

최근의 디플레는 신용축소현상을 지칭하는 디레버리지와 관련이 깊다. 디레버리지란 은행입장에선 대출을 회수하는 것이고 차입한 측에선 빚을 갚는 것이다. 금융회사들은 당장의 유동성 부족에서 벗어나기 위해 채권회수에 혈안이 돼 있고,레버리지 효과를 노려 차입을 최대한 늘렸던 투자은행과 헤지펀드 등은 차입금상환 압력 및 환매요구에 응하기 위해 보유자산을 무차별적으로 내다팔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어 회사 사정은 악화되고 운신의 폭은 더욱 좁아진다. 게다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거나 새로 발생할 손실도 적지 않다고 보면 사태의 해결은 여전히 멀다. 그러니 경제가 축소지향으로 기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우리나라가 태풍의 한 가운데에 있다는 점이다. 수출에 의존하는 우리 경제구조를 감안하면 선진국 경제의 디플레 국면 진입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우리 경제의 구명줄이라 할 수 있는 수출마저 감소할 경우 곧바로 기업들의 실적악화로 연결되는 것은 물론 나라 경제 전체가 깊은 수렁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우리 경제 상황은 우울하기 짝이 없다. 투자와 소비가 꽁꽁 얼어붙은 것은 물론 고용사정도 말이 아니다. 기업들이 자금난을 호소하고 있고 정부와 한은도 연일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은행권은 국제결제은행(BIS) 건전성 비율 등을 의식해 자금줄을 꼭꼭 조이고만 있을 뿐이다. 더구나 외국인들마저 주식을 내던지고 달러화를 빼내가면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심지어 내년 성장률이 마이너스로 추락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는 판이다. 정말 이대로 가다간 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지는 최악의 상황이 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때문에 과감한 대책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돈이 돌게 하는 방안부터 찾아야 한다. 은행의 자본 확충을 지원하고 유동성 공급을 더욱 늘리는 등의 방법으로 BIS비율 유지 부담을 덜어줌으로써 기업으로 자금이 흘러갈 수 있게 해야 한다. 사회간접자본(SOC)투자를 늘리고 기업지원책을 마련해 일자리를 최대한 지켜야 함은 물론이다. 미국도 구제금융 7000억달러 외에 모기지증권 매입 등에 8000억달러를 추가로 투입키로 하는 등 위기 극복을 위해 총력전을 펴고 있는 상황 아닌가. 다른 나라들은 앞다퉈 은행과 기업을 지원하는데 우리만 이를 외면한다면 불이익을 자초할 뿐이다.

더블 D의 망령에 과감히 대처하지 못하면 기업이 줄도산하는 디폴트(Default)사태로 이어지며 트리플D의 망령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우리 경제가 어찌될지는 상상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