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딛고 '담대한 희망' 쐈다 … 사회활동가서 인권변호사로 '풀뿌리 저항'운동 '검은 케네디'

"흑인의 미국도,백인의 미국도,아시아계 미국도 없습니다. 오직 '미합중국'만이 있을 뿐입니다. "

무명 정치인이던 버락 오바마를 일약 정계의 샛별로 떠올려 놓은 2004년 7월27일 미 민주당 전당대회 연설 내용이다. 그로부터 4년여 후 그는 당시의 연설을 입증이나 하듯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다.

1961년 8월4일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케냐 출신 흑인 아버지와 캔자스주 출신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오바마는 어린시절 일찍 '절망'을 배웠다. 불과 두 살 때 아버지 버락 오바마 시니어가 하버드대 박사 과정을 마치고 조국을 살리겠다며 귀국하는 탓에 가정이 깨져 버렸다. 이후 어머니는 인도네시아 출신 유학생 롤로 소토로와 재혼했다. 새 아버지와 함께 인도네시아에서 살던 아홉 살 때 오바마는 충격적인 기사를 접한다. 피부색이 희면 행복이 보장된다는 광고를 믿고 화학 수술을 받은 사람들의 처참한 후유증에 관한 것이었다. 그날 밤 오바마는 발가벗은 채 거울 앞에 섰고 자신의 피부색을 보며 좌절의 눈물을 흘렸다.

하와이에 있던 외할아버지 집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피부색에 대한 열등감'은 그의 머리와 가슴을 가득 채웠다. 고등학교 시절 술과 담배 마리화나에 손을 댄 것은 피부색에 대한 분노와 정체성에 관한 혼란 때문이었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던 청년 오바마 시절에도 번뇌는 계속됐다. 그가 대학 졸업 후 시카고 빈민지역인 사우스사이드 지역에서 공동체 운동에 나선 배경에도 분노가 깔려 있었다. 무능한 백악관과 부패한 의회에 대한 '풀뿌리 저항'이었다. 그는 여기서 미국 사회의 모순과 정면으로 맞서 투쟁을 벌이며 비로소 희망을 엿보기 시작한다. 석면 노출 등 환경 문제로 당국과 싸워 승리하면서 '변화의 힘'을 믿게 된 것이다.

진정한 변화를 위해선 지역 환경뿐 아니라 국가의 법과 정치 체계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느낀 오바마는 뒤늦게 하버드대 법대에 진학한다. 이 시절 법대 학회지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하버드 로 리뷰'의 흑인 최초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당시 여름 인턴 사원으로 시카고 법률회사에 현장 실습을 나갔고,그곳에서 프린스턴대에 이어 하버드대 로스쿨을 오바마보다 먼저 졸업한 평생의 반려자 미셸을 만났다. 그들은 로펌에서 두 명뿐인 흑인이었다. 그는 졸업 후 1990년대 초 시카고에서 인권 변호사로 활동했고 시카고대 로스쿨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1992년엔 미셸과 결혼했다.

담대한 포부를 품고 있던 오바마는 1996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본격적인 발을 내디딘다. 그는 이때부터 희망을 전파하고 나섰다. 그는 특히 2004년 보스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전국적인 인물로 떠오른다. 전국에 생중계된 전당대회에서 그는 타협과 통합을 강조하는 '담대한 희망'이라는 연설을 통해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내 부모님은 나에게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란 뜻의 버락(Barack)이란 아프리카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미국에서 이름은 성공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희망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오늘 내가 물려받은 다양성에 감사하고,내 부모님들의 희망이 귀여운 내 두 딸에게도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미국 정신입니다. "

그는 미국인들에게 새로운 꿈과 희망을 보여 줬고 그때부터 사람들은 첫 흑인 대통령의 가능성을 엿보기 시작했다. 2004년 11월 일리노이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70%의 기록적인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그는 중앙 정치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로부터 4년 뒤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급부상한 그는 대통령을 향한 출사표를 던진다. 대중을 사로잡는 연설과 신선함으로 '검은 케네디' 돌풍을 일으켰고,미국민들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그를 미국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선택했다.

유병연 기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