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공학간 경계 허물고 '적과의 동침'
에이즈 치료법 등 획기적 新기술 개발

1995년은 에이즈(AIDS.후천성 면역결핍증) 환자들에게 기념할 만한 해다. 걸리면 무조건 죽는 것으로 알려졌던 에이즈를 당뇨병처럼 '관리'해서 수명을 대폭 연장할 수 있는 새로운 치료 방법이 세계적 과학잡지인 네이처에 발표됐기 때문이다. 이 논문을 쓴 대만계 미국인 데이비드 호(56)는 이듬해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에 뽑혔다.

그는 1998년 하버드대와 MIT 연구진 앞에서 "내가 사용한 핵심적 기술은 모두 모교인 HST에서 배운 것"이라며 "만약 내가 의학에만 집중하고 의학의 물리적인 배경과 연구에 사용되는 기술,수학 등을 익히지 않았더라면 논문을 쓰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호 박사가 말한 HST(Health Science&Technology)는 하버드 의대(HMS)와 매사추세츠 공대(MIT)가 1970년 시작한 의.공학 통합 프로그램을 말한다. 라이벌 대학이 손을 맞잡았다고 해서 '적과의 동침'사례로 불리는 프로그램이다. 호 박사는 1978년 이곳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은 호 박사를 포함해 1250명.이 중에는 올해 기술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밀레니엄 기술상'을 수상한 바이오엔지니어링 분야의 스타 연구자 로버트 랑거 교수 등 쟁쟁한 사람이 상당하다. 지금도 400여명의 석.박사 연구자들은 MIT의 뛰어난 기술력과 하버드 의대의 임상시험 노하우를 한데 섞어 새로운 바이오 테크놀로지를 개발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모토는 '연구실 의자에서 환자의 침상까지'다. 연구실에서 심혈을 기울여 기술을 개발하고 그 기술을 병원의 환자들에게 유용하도록 활용하자는 의미에서다. 실제 HST의 성과는 눈부시다. 매년 유명 학술지에 등재되는 SCI(과학기술논문색인)급 논문이 쏟아져 나온다. 지난해 4월에는 두개골을 뚫지 않고 두뇌의 내부를 찍을 수 있는 스캔 기술이 발표됐다. 연구진은 이 기술을 이용해 출산 예정일보다 7주 이상 빨리 태어난 어린아이의 두뇌는 주름이 거의 없는 덩어리라는 것을 알아냈다. 두뇌는 출산 예정일로부터 2~7주 전에 급속히 주름이 많아지며 태어난 후 2년가량이 지나면 성인과 같은 쭈글쭈글한 두뇌가 완성된다는 것.이 연구는 자폐증의 원인을 밝힐 수 있는 획기적 연구로 학계에서 평가받고 있다.



작년 8월에는 한국인인 최원식 박사 등이 이끈 HST 연구팀이 살아 있는 세포의 내부를 3D 영상으로 찍을 수 있는 기술을 발표했다. 이전까지는 세포를 얼리거나 염색해서 세포가 죽은 뒤에야 내부를 촬영할 수 있었다.

HST가 이처럼 뛰어난 성과를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학문 간 칸막이'를 없앴기 때문이다. HST의 제프리 M 카프 바이오메디컬엔지니어링 학과 교수는 "HST에서는 자기 주 전공 외에도 MIT와 하버드대학의 교과목을 모두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유수 대학 병원과 협력 연구에도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각 기관이 소유하고 있는 값비싼 장비와 기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는 "이는 HST 학생들이 의대 혹은 공대 출신 학생들보다 독창적인 연구 주제를 찾고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할 기회를 준다"고 설명했다.

의대.공대.병원 간의 유기적 협력 체제를 중시하기 때문에 HST에는 독자적인 건물이 없다. 학생들 중 일부는 하버드 의대에서,일부는 MIT에서,일부는 보스턴 지역 병원에서 각자 연구를 진행한다. 카프 교수는 "이 과정에서 공식.비공식 인적 네트워크가 쌓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졸업 후에도 대학과 병원을 넘나들며 연구를 지속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바야흐로 '학문 융합시대'다. '학문 융합' 시도는 최근 들어 점점 가속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공학 등 실용학문이 학문 융합을 주도했다. 최근에는 사회학.자연과학 등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호주국립대(ANU)가 3년 전 개설한 '페너(Fenner)스쿨'은 기후변화에 대한 대처와 지속성장을 모색하기 위해 만든 학부다. 기후학 사회학 천연자원학 등 6개 학과를 합쳐서 하나의 교육과정을 가르치고 있다. 페너스쿨 설립을 주도한 마이클 허친슨 교수는 "기후변화와 같은 인류 보편의 문제는 개별 학과에서 가르칠 수 없고 통합해서 가르쳐야 큰 그림을 볼 수 있다"며 "특히 국제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여러 학문이 합쳐져야 한다"고 말했다.

복수학위와 달리 융합(Transdisciplinary)학부는 여러 학문 분야를 가르쳐 하나의 학위를 준다. 페너스쿨에서는 호주의 지리학 생태학 환경학뿐 아니라 역사와 경제까지 가르친다. 허친슨 교수는 "현재는 페너스쿨 한 곳만 융합학문을 가르치고 있지만 조만간 ANU 전체가 여러 학과를 통합해 가르치는 형태로 바뀔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 존스홉킨스대는 뛰어난 의학과 생물학을 컴퓨터공학과 접목한 '생물정보학(bioinformatics)' 과정을 개설했다. 방대한 생물의 유전자 정보를 다루기 위한 학문이다. 이 프로그램은 절반가량은 생물학.화학.의학 등 과학 강의로,나머지 절반은 컴퓨터 프로그래밍 등 데이터를 수집.분석.분류하기 위한 기술로 구성된다. 크리스티나 오봄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일반 석.박사과정 학생도 있지만 다른 나라의 컴퓨터 전문가나 생물학자 등이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수강하기도 한다"며 "이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모든 수업을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각각 구성해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융합학문이 잇따르고 있는 것은 세계의 국경과 업무의 영역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어서다. 업무와 국경의 개념이 애매모호해지면서 이를 넘나드는 창조적 인재를 양성하는 게 시급해지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학문이 필요하다. 그 필요성에서 나타난 것이 바로 융합학문이다. 창조적 인재는 앉아서 나타나는 게 아니다. 필요하면 학교와 교육의 개념까지 바꿔버려야만 창조적 인재를 얻을 수 있다.

보스턴.워싱턴(미국)=이상은 기자

/캔버라(호주)=정태웅 기자 se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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