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원유 수출국인 러시아 경제가 국제유가 하락과 그루지야 사태로 인한 서방과의 갈등에 미국발 금융위기까지 몰아닥치면서 큰 충격파에 휩싸였다. 16일엔 증시가 장중 20% 가까이 폭락하면서 당국이 일시적으로 거래를 중단시키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러시아 정부가 외국 자본 이탈과 유동성 부족에 대한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은행권에 단기자금을 긴급 수혈하고 국부펀드까지 풀겠다고 약속하는 등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불안감에 사로잡힌 투자자들은 서둘러 주식시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증시 폭락,마진콜 위험 가중

17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루블화로 표시되는 모스크바 증시의 MICEX지수는 16일 17.45% 급락한 881.17로 마감했다. 장중엔 20% 가까이 빠졌다. 1998년 러시아 금융위기 이후 하루 낙폭으로는 가장 크다. 달러로 표시되는 RTS지수는 1132.12로 11.47% 떨어지며 2006년 1월 이후 2년8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지난 5월19일의 최고점(2487.92)과 비교하면 54%나 추락한 것이다.

특히 유동성 위기에 민감한 은행주들이 가장 많이 하락했다. 국영은행인 스베르뱅크와 VTB 주가는 이날 각각 23%와 31% 폭락했다. 유가 급락에 따라 로즈네프트(-22%)와 가즈프롬(-18%) 등 에너지주도 급락세를 면치 못했다. 이날 증권당국은 패닉 상태에 빠진 시장을 안정시키 위해 장중 한때 거래를 중단시켰다.

FT는 증시 급락으로 '마진콜'에 직면한 러시아 트레이더들이 포지션을 청산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고 있다고 전했다. 주가가 계속 떨어지면서 증거금을 추가 납부해야 하는 트레이더들이 상황이 여의치 않자 손실을 본 상태에서 보유주식을 매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주가가 더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진다.

FT는 또 금융회사들이 신용도가 낮은 금융회사나 증권사에 대한 신용한도를 축소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모스크바 소재 은행인 KIT파이낸스는 단기자금시장에서 빌려 쓴 자금을 제때 갚지 못했다는 소문을 시인했다. 유동성 축소로 단기자금시장의 금리도 폭등세를 보이고 있다. 이날 은행 간 차입금리는 연 8.45%로 11%나 뛰었다. 2004년 여름 이후 가장 큰 폭의 상승세다.

◆유동성 우려…정부개입 속수무책

러시아 정부는 중앙은행과 정부 당국자들이 나서서 시장의 불안심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쓰는 한편 시장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알렉세이 쿠르딘 러시아 재무장관은 "러시아 금융시장은 결코 시스템적 위기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중앙은행은 이날 사상 최대 규모인 141억6000만달러를 단기자금시장에 긴급 투입했다. 재무부가 추가로 58억달러를 은행권에 지원했다. 콘스탄틴 코리쉬첸코 중앙은행 부총재는 "중앙은행과 재무부는 금융시장에 총 1176억달러의 자금을 제공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이 같은 긴급자금 투입 등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투자자들과 은행들이 돈을 빼가고 대출을 회수하면서 유동성 우려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대거 빠져나가면서 루블화 가치도 크게 떨어졌다. 지난 7월14일 달러당 23.15루블이었던 루블화 가치는 17일 25.53루블에 거래돼 두 달 새 9%가 빠졌다.

모스크바 소재 우랄시브은행의 크리스 위페르 수석 투자전략가는 "러시아 금융시장은 전에 경험하지 못한 공포와 망연자실한 상태에 빠져 있다"며 "누구도 끝이 어디인지 속단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박성완 기자 psw@hankyung.com